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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빗ORBIT Mar 19. 2021

빛의 문


 물이 만든 문 아래 우리는 서 있는 거래. 물과 문의 옛말인 지게가 합쳐져서 무지개가 된 거야. 사람들은 무지개가 일곱 색깔이라고 그러던데 이상한 일이지. 빛을 나누고 쪼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에게 무지개를 들려주고 싶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 빛 또한 소리처럼 파동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언젠가 무지개의 음률을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뉴턴 이전에 사람들은 무지개를 일곱 색깔이라 여기지 않았다고 해. 도래미파솔라시. 그래. 음계 말이야. 무지개를 연주하면 어떤 음악이 될까. 호수 위로 던진 물수제비가 내는 세 번의 퐁, 퐁, 퐁. 산사의 풍경소리. 혹은 먼 옛날 신라의 미실이 연주하던 유리 실로폰. 그런 가볍고 맑은 물성의 소리가 아닐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계를 너는 가끔 곤혹스러워했지. 청보리밭의 보리가 물결치는 모습과 갈대숲의 농익은 바람을 구분하지 못하겠다고 안타까워했어. 여름과 가을의 질감은 이렇게나 다른데. 그렇게 탄식하는 바람에 나는 찔끔 울었던 것도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거대한 순진무구와도 같아서 만물을 신기해하는 너의 아이 같은 모습에 종종 감동받기도 해. 천둥이 치기 전 벼락으로 대비한 나의 예지를 놀라워하던 너의 모습.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는 것은 부러 말해주지 않았지. 우쭐한 마음이었나 봐. 그때는 나도 어렸으니까. 이제 열을 세기 전에 천둥이 울릴 거야. 소리에 민감한 너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던 우려가 무색하게 쿵쿵 대지를 울리는 천둥소리에 너는 기뻐했어. 언니는 진짜 예언가인가 봐.  

 

보인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오류. 추리 영화를 같이 볼 때면 언제나 먼저 범인을 맞추는 것은 너였지. 언니, 보이는 게 다는 아니야. 너는 유능한 탐정 같은 표정을 짓는다. 너의 잘난 척에 나는 배가 부르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아는 것이라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는 너의 오감을, 너답게 조경한 그 아늑한 어둠을 지켜주고 싶어서 나는 가만히 숨을 참는다. 빛에는 어떤 냄새가 나? 빛은 무슨 맛이야? 빛에는 어떤 소리가 날까? 빛은 대체로 따뜻한 거 같아. 태어날 때부터 암흑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에게 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의 어둠 속에 너울지는 희미한 형체를 빛이라 말하기에 나의 설명은 초라하고 가난했어.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멍하니 바라본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극장을 떠난다. 우리는 늘 마지막에 극장을 벗어나지. 극장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야. 영화에서 아무리 살인과 범죄가 일어나도 관람객인 우리는 안전하게 이 어둠을 벗어날거야. 너는 극도의 어둠에서 극도의 밝음을 조금이나 느낄 수 있어 짜릿하다고 했어. 빛이 있으라.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라고 했지. 그것은 어쩌면 인류 최초의 명대사. 우리는 어둠이 빚어낸 사람들처럼 불쑥 빛으로 출현해 유유히 걸어 나간다. 그 날 바깥에는 비가 왔다 갠 것인지 무지개가 떴어. 무지개는 물의 문이 아니야. 빛의 문이지. 너는 예의 유능한 탐정 같은 표정으로 무지개를 단정한다. 유난히 둥근 무지개였을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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