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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빗ORBIT Apr 18. 2020

목성공포증

달 대신 목성이 떴다. 심해에서 흰수염고래를 마주친다면 비슷한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온 시야를 다 메우고도 남는 거대한 크기였다.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팔뚝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너무 크고 의외의 것을 보면 공포증이 생겼다. 폐쇄된 공간이나 높은 곳이 주는 공포와는 다른 이질감이었다.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위해 눈 덮인 설악의 능선을 넘을 때에도 같은 느낌이었다. 백호의 등짝 같은 떡 벌어진 산 전체가 하얗게 살아서 달려들 것만 같았다. 속이 메쓱거렸다. 밤이 채 찾아오지 않았는데도 도시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달빛 대신 번쩍이는 가스층이 눈앞을 가로막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종말을 부르짖는 사이비 종교인들과 휴대폰 카메라로 실황을 중계하기 바쁜 행인들 사이를 비집고 편의점으로 뛰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 하루의 시작이 꼬인 느낌이었다. 나는 그저 오늘의 편돌이로 야간 알바를 무사히 마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달 대신 목성이 뜬다고 내 목구멍에 저절로 먹을 것이 굴러 들어오진 않는다. 난데없는 거대 행성의 창궐이 간당간당한 알바 자리마저 앗아갈까 봐 걱정이 될 뿐. 야 밖에 봤냐. 난리던데. 유리창 너머에 시선이 빼앗긴 앞 교대 여드름이 유니폼도 넘기지 않고 넋이 나가 있었다. 오늘 폐기 좀 남았어? 늦게 일어나서 아무것도 챙겨 먹지 못한 빈 속이 쓰렸다. 인기가요 샌드위치 하나 남았을 거야. 먹어 돼지야. 창 밖에서 둔 시선을 멍하니 고정한 채 이름표 그대로 유니폼을 내게 던졌다. 천목구. 괴랄한 이름이 이 편의점 알바들에게는 세습되었다. 사장은 일회성 알바들의 이름을 따로 새겨주지 않았다. 전설의 천목구. 아마도  편의점 개업 때 처음 일했을 천목구. 여드름 난 천목구가 폐기를 탐하는 돼지 천목구로 바뀌었다. 누구더러 돼지라고 하는 걸까. 자기도 만만치 않으면서. 기분이 뭣 같았지만 폐기를 남겨준 성의를 봐서 참기로 했다. 목성이 떴으니 외계인이라도 침공하게 되는 걸까. 화성인, 토성인, 수성인 이런 것들은 상상이 가는데 목성인이란 쉽게 그려지지가 않았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담배가 피고 싶어 졌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흡연을 해서 끊을 수가 없다. 엄마는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달동네 태양 빌라 최고의 골초였다. 세상 당당한 미혼모였던 엄마는 사실 방안에서도 나를 키우는 내내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 대신 술은 안 했다. 너희 애비가 술고래였어. 술은 꼴도 보기 싫다. 술 살 돈 아껴서 담배 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나는 그런 엄마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취미 생활이 두 개나 되는 건 너무 호사스러운 일이니까. 짤랑. 어서 오세요. 블루베리 쨈과 삶은 계란샐러드가 발린 요상한 조합의 샌드위치를 뜯으려다 대충 카운터 밑으로 치워버렸다. 나중에 먹어야지. 음료 코너 너머로 보이는 단발머리 뒤통수가 기웃거렸다. 손님이 물건을 골라 오는 동안 창밖의 목성을 구경하기로 했다. 여전히 크고 웅장하고 무서웠다. 너무 커서 나 같은 건 무신경하게 눌러 죽일 수도 있을 압도적인 풍채였다.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짐승의 포효처럼 자전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에너지 드링크를 골라온 단발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캡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못 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너무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달 대신 목성이 뜬 것보다 눈 앞의 단발머리가 더 놀라워지는 순간이었다.

-엄마

엄마는 죽었다. 분명하다. 전역하기 한 달 전 교통사고였다. 마지막 휴가는 엄마의 장례식으로 대체되었다. 직접 확인하고 염도 했었다. 애매하게 젊고 대놓고 가련했던 엄마. 아스팔트에 산산조각이 난 작은 육체는 너무나 덧없었다. 세상으로부터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삭제된 엄마. 내가 아니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사람. 엄마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평소에 잘 피던 담배를 눈짓으로 골랐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젊었을 때 모습보다 더 어려보였다. 검은 옷과 검은 워커는 처음보는 착장이었으나 여자는 분명 엄마였다. 목성이 떠서 내가 미친 건지 달이 사라져서 엄마가 돌아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간 편돌이 천목구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목성이 개미를 잡듯 나를 슬쩍 눌러본 게 아닐까.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사람 귀에 들릴 리 없는 목성의 자전 주파수가 계속해서 귓가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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