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를교의 전설
'다리' 보다 연인의 사랑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건축물이 또 있을까? 영화 <퐁 네프의 연인들>의 퐁 네프 다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그리고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은하수 다리까지, 다리는 사랑과 이별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프라하의 까를교도 예외는 아니다. 까를교는 프라하에서 연인들이 가장 많이 걸어 다니는 곳이자 그들의 영원한 사랑을 가장 많이 기약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한국인 밀집도가 가장 많은 관광지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까를교는 많은 매력을 품고 있다. 우리에게는 로맨스의 상징으로, 체코인들에게는 오랜 시간 프라하와 함께 한 역사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프라하가 체코의 수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봤어도 까를교가 프라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에게 까를교는 하나의 건축물 그 이상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신기하게도 프라하를 여행한다면 어떻게든 지나치는 곳이 이 까를교이다. 왕의 길을 따라 걷든 아니면 관광객들을 따라 생각 없이 걷든 한 곳으로 모이는 곳은 결국 까를교이다. 체코 유명 감독인 까렐 바섹(Karel Vacek)은 까를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라하 성과도 바꿀 수 없다.' 그만큼 까를교는 체코인들에게나 관광객들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관광지로서의 중요 역할을 하지만 예전부터 까를교는 프라하 구시가지와 프라하 성이 있는 말라 스트라나(소 지구)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로 상인들과 귀족들에게 보행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만큼 이 까를교에는 전설이나 전해져 내려오는 옛 이야기가 많다.
프라하에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첫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강바닥이 얕은 몇 군데에서만 강을 건너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옛 고서에 따르면 신화 속의 왕자인 크르즈소미슬(Křesomysl)이 9세기에 만든 거대한 보트만이 이곳을 왕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로 10세기경에 이르러 최초의 목재 다리가 블타바 강에 놓이고 1158년에 최초의 석재 교량이 건설되었습니다. 프라하에 놓인 500m 길이의 이 석재 교량은 그 당시 중앙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였고 아직까지 어떤 기술로 지어졌는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당시 프라하 시민들은 이 다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이 다리의 이름은 블라디슬라브 2세(Vladislav II)의 부인 유디타(Judita)의 이름을 따 유디타의 다리(Juditin Most)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유디타 다리는 까를교 이전의 다리로 현재 구시가지 광장 Hospitaller Knights' Monastery에서 아치 형태의 교량 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342년의 거대한 홍수로 인해 이 다리는 완전히 유실되었고 이는 프라하에 엄청난 무역 적자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로마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까를 4세는 예전과 같은 석재 다리를 지으라고 강력하게 명령했습니다.
까를왕은 왕실의 천문학자를 불러 하늘이 내려주는 날짜를 받게 하였고, 천문학자는 계산에 의해 1-3-5-7-9-7-5-3-1 이란 숫자를 얻게 되는데, 이는 1357년 7월 9일 아침 5시 31분(서양은 dd-mm-yy 순서로 날짜를 표기합니다.)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까를왕은 비투스 성당을 지은 페트르 파를레르즈(Petr Parléř)에게 예술적으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견고하게 지으라 명령했고 곧바로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페트르 파를제르즈는 견고한 다리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중 하늘의 계시를 받고 날 계란과 와인을 섞은 반죽을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프라하에는 이를 충분히 충당할 만한 계란이 부족했고 결국 왕령에 의해 보헤미아 전역에서 계란을 모으게 됩니다.
이때,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인 벨바리(Velvary)에서는 계란이 깨질 것이 염려되어 모두 삶아서 보냈는데, 날 계란이 필요해 왕령을 내렸던 프라하에서 벨바리 마을 사람들은 웃음거리가 되었고 몇 세기가 지나도록 '벨바리 = 멍청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게 이르렀습니다.
또한 프라하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운호슈티(unhošť) 마을에서는 날 계란 그대로 잘 보냈지만 쓰임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까닭에 우유와 치즈까지 보내는 우를 범하게 되고 역시 벨바리 마을과 같은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렇게 까를교는 보헤미아 각 지방의 도움을 받아 석재뿐만 아니라 와인과 보헤미아의 계란 그리고 운호슈티의 크림치즈까지 들어간 사상 유래 없는 다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상한 레시피 때문이었을까요? 이후 까를교는 큰 붕괴 없이 500년간 블타바 강을 잇는 유일한 다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처럼 까를교는 당시 보헤미아 국민들의 노력으로 완성되었다. 이 때문일까, 까를교 위에는 프라하 가톨릭의 동상부터 프라하 시민들이 존경했던 얀 네포무츠키 성인까지 각종 동상들이 놓여있으며 각종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와 건설 신화를 제외한 여러 전설들이 많이 전해진다.
프라하의 까를교는 진짜 걸어본 사람만이 그 특이한 기운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처음 까를교로 향한다면 프라하 성을 바라보며 가게 되는데, 이때에는 다리 위에서 보이는 프라하 성의 전경을 보면서 걷게 되며 프라하 성의 고풍스러운 느낌에 한 껏 취하게 된다.
반대로, 프라하 성 쪽에서 프라하 구시가지 쪽으로 걷게 되면 이때야 비로소 까를교의 낭만에 젖어들게 된다. 까를교 위에 펼쳐지는 각종 악단들의 노랫소리와 프라하 성을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그리고 왼쪽에는 화려한 루돌피뇸과 오른쪽에는 프라하 시민들이 자존심의 프라하 국립극장 까지, 황금색의 불빛이 내 눈을 감싸면 어느덧 까를교 끝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정말 까를교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프라하 성 조명이 꺼지는 12시 55분 이후, 맥주 한 병을 사들고 천천히 걸으며 즐겨보자.
그 시간, 그 장소가 바로 만남과 로맨스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