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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Jul 10. 2020

고독에서 가장 고독한 곳으로의 마실

효자동 745-6

편지를 쓰려고 펜을 꺼냈더니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가 떠올랐어.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로 시작하는 시 말이야. 시는 이렇게 이어지지.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오지 않는 전화 따위 기다리지 않고,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꿋꿋이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봐. 어때? 나는 솔직히 엄두가 나질 않아. 그래도 그렇게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 살아가는 거라면 계속해봐야지 어쩌겠나 싶기도 하고 그렇네.

참, 외로움이랑 고독감은 다른 거래. 사전마다 풀이가 조금씩 다르지만, 말하자면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고 고독감은 홀로 됨을 느끼는 것이지. 누구 말로는 외로움은 누군가와 함께 있지 못해 괴로워하는 거고 고독감은 스스로가 혼자임을 인정한 채로 그걸 맘껏 느끼는 거라고 하더라. 다 비슷한 얘기지. 그러고 보면 정호승 시인이 하고 싶었던 얘기도 ‘고독을 견뎌내라’는 것에 가까웠을는지도 몰라.

나는 고독이 고개를 빠끔 내밀기라도 할 때면 줄곧 가장 고독한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왔어. 고독과 고독이 아닌 것 사이에서 애매하게 있기가 싫어서야. 일단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적한 길을 따라 걸어.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귀부터 막는 버릇이 있거든. 그러고서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는 거야. 상영관이 하나밖에 없는 작은 영화관이나 주인장이 고심 끝에 고른 몇 권의 책만 있는 책방 같은 곳.

여기 오는 길에 택시 아저씨가 강원대 후문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면서 혀를 내두르시더라. 네 얘기가 생각났지. 너는 외로움이 찾아왔을 때 아무도 모르게 붐비는 곳에 간다고 그랬잖아. 이를테면 강원대 후문 혹은 명동이나 영화관에. 나도 따분함을 견딜 수 없는 날에 ‘누구든 한 명만 받아라’ 하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리던 때가 있었으니까 네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도 이해가 됐어.

난 지금 명동에서 가까운 작은 책방에 와있어. ‘책방 마실’이라는 곳이야. 이름이 귀엽지. 마실. 산책과 소풍 사이의 느낌이 들잖아. 비가 내려 조금 으슬했는데 오자마자 따뜻한 보리차도 한 잔 내어주셨어. “보리차 드릴까요? 방금 끓여서 딱 맛있어요.” 하시는데 보리차를 받아 들고 한 모금 삼키기도 전에 몸이 녹는 것 같더라. 이렇게 혼자 책방에 올 때는 어떤 책을 살지, 몇 권이나 살지, 그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가. 다짐한 대로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손에 집었을 때는 보물찾기에서 제일 좋은 선물이 적힌 종이를 찾았을 때처럼 기쁘거든.

오늘은 고독한 책을 한 권 사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며 왔어. 주신 보리차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꽤 오래 책방 구석구석을 뒤진 것 같아. 이 책 저책 뒤적이다가 책 소개가 적힌 메모들을 하나씩 읽어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필사하고 있는 노트에 나도 한 줄 거들었지. 이런 작은 책방은 주인장의 취향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니까 책의 진열 방식이나 조용히 깔리는 BGM만 유심히 들여다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돼.

운 좋게 고독을 말하고 있는 듯한 책을 하나 골랐어. 책을 고를 때 어떤 걸 보는 편이야? 나는 띠지나 표지에 쓰여있는 소개글이나 서문을 꼼꼼히 읽어봐. 이 책도 뒤표지를 보고 집어 들었거든. 아마 작가의 말인 듯한데 이렇게 적혀 있더라. “아무리 드넓은 바다에 모두 모여있어도 우리는 각자의 해변에 누워 각자의 바다를 바라봅니다. 내가 대면하는 파도는 오로지 나에게만 다가와 뒷걸음질 치게 합니다.” 이걸 읽는 순간에 파도 들이치는 소리만 울리는 해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상상이 들었어.

나 일곱 살엔가, 대중목욕탕에서 만난 초등학생 언니가 수영을 가르쳐 준답시고 흰 바가지 두 개를 포개 쥐어주고는 냉탕에다 나를 떠밀었던 적이 있거든? 또 중학교 때 동강에 갔다가 친구가 장난을 치는 바람에 뿌옇고 누런 강물 속을 뜬 눈으로 허우적거린 일도 있고. 이거 말고도 물을 무서워하는 이유로 둘러댈 에피소드가 몇 가지 더 있었으니까 나는 수영을 못하는 것에 대해 떳떳함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지. 그러다가 학교를 휴학하고 아침 시간이 한가해지니까 문득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아마 누가 해변이나 수영장에 가자고 할 때마다 나오는 이 낡아빠진 변명 대기를 집어치우고 싶었나 봐.

풀장에 간 처음 며칠은 정말이지 물을 엄청 마셨어. 아주 잠깐 수면 위로 고개를 돌리는 찰나만으로는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다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호소했는지 몰라. 그런데 그 선생님 정말 매정했지. 수영 배우면서 물 먹을 각오는 당연히 해야 한다며 팔 휘젓는 것과 힘차게 발을 차는 법만 알려줬어. 나는 눈도 맵고 코도 매웠지만, 다 커서 엉엉 울기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사람들이 전부 돌아간 뒤에 1시간씩 남아서 혼자 연습을 했어. 숨쉬기와 온몸으로 물을 저어내는 것 사이의 오롯한 균형 찾기를 위해.     

그동안 삶 속에서도 이렇게 버둥대고 있었을 텐데 나는 숨이나 제대로 쉬며 살고 있던 걸까. 그런 생각에 물이 들어찬 귀처럼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어. 방금 고른 책에는 파도 앞에서의 고독 말고도 삶에 대한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 또 목련이나 고양이, 여름날의 저녁에 관한 이야기들도 잔뜩 들어있네. 여기 앉아 책을 보고 있자니 몇 번인가 같이 서점에 가 너에게 책을 골라줬던 기억이 난다.

벌써 웃음이 나. 너는 책 한 권을 건네주면 하루에 한 장씩만 읽는 친구지. 두 시간짜리 영화를 추천해주면 다 보는데 2주가 걸리잖아. 까무룩 금세 잠들어버리는 게 눈에 훤한데도 아껴서 보느라 그렇다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너를 보면서 속으로 머리를 몇 대나 쥐어박았어. 그래도 어쩌면 취향에 맞지 않았을 것들을 꾹 참고 끝까지 봐주어 고마워. 거기서 몇 구절, 몇 장면 가져와서 좋았다고 말해준 것도 고맙고. 나는 사실 네가 알려준 뮤직비디오 중에 몇 개는 금방 껐거든.

너한테 ‘누구한테 잘해라’, ‘좀 친절하게 굴어라’ 잔소리를 많이도 하는 나지만, 사실 너를 통해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해. <사람이 없어> 말이야. 너는 사랑 노래를 못 쓴다 했는데 나는 이 노래가 네가 쓸 수 있는 진짜 사랑 노래라고 생각해. 간질거리는 부분 없이 솔직하고 찌질한 가사. 으이구.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사람을 잃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 서성이는 너나 사람을 떠나 사람이 없는 곳으로 숨어드는 나나 오롯한 균형을 찾으려 애쓰던 거겠지? 우리 다음에 또 서로에게 사랑이 찾아오면 그땐 제발 최선을 다하라고 자꾸 잔소리를 해주자. 누구나 외롭고 누구든 자기 인생을 홀로 짊어지고 가겠지만 사랑은 계속해야 하니까.     

이번 여행에서는 종종 택시를 타야 할 것 같아. 춘천은 버스 타고 다니기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아. 서로 다른 번호를 단 여섯 대의 버스가 7분 간격으로 오는데 모두 같은 노선처럼 느껴져. 40분 넘게 기다려야 하는 한 버스만이 다른 방향으로 가지. 그게 내가 타야 할 버스고. 이 책을 마저 다 읽고 책방을 나갈 때는 뭘 타는 편이 좋으려나. 그쯤 비가 좀 덜 내린다면 나가서 걸어볼까 해. 이를테면 강원대 후문 혹은 명동으로.


- 주인과 어느 손님, 나 모두 각자의 책에 빠져있는, 책방 마실에서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436828

* 이 원고는 2018年 어반플레이 웹매거진에 '춘천 음악기행' 시리즈로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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