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선동 9-22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누시는 얘기를 엿듣는 게 좋아. 지금 나는 할아버지 다섯 분이 모여 수다 삼매경에 빠지신 커피숍에 앉아 귀를 쫑긋하고 있어. 시치미 뚝 떼고 가만히 앉아 편지 쓰는 체를 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아챈 할아버지가 “요놈, 딱 걸렸다!” 하면서 꿀밤을 먹이실 일은 없겠지?
여기가 춘천에서 40년 넘게 자리를 지킨 커피숍이래. 그보다 더 대단한 건 40년째 단골손님으로 여길 찾는 어른들이 많다는 거지. 새로운 가게가 생기기 무섭게 그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서고, 어느새 또 다른 간판이 달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는 나에게는 40년 동안 같은 가게를 드나드는 건 어떤 마음일지 가늠이 안 되네.
오래된 곳이 좋아. 자연히 낡거나 헤진 것들이 잔뜩 있잖아. 묵은 때나 먼지가 쌓인 모습을 보는 것도 나는 좋아해. 그런 걸 유심히 보면서 여기에서 벌어졌을 사소한 일들, 오고 갔을 대화들을 상상해보는 거지.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진 어르신들이 매일같이 여기 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니까 사장님은 커피값을 올리기도 어려웠을 거야. 요즘 커피 한잔에 2,000원 하는 데가 어디 있겠냐고.
손님들 대부분이 사장님 친정의 큰오빠나 아버지 또래 어른들이라 친정 식구를 모시는 마음으로 가게를 하고 계시대. 이따 찌개 끓일 거니까 저녁들 드시러 오라고 하시는 걸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채 웃고 말았어. 그러고 보니 저기 문 바로 앞 테이블에서는 할아버지 한 분이 오징어채에 소주를 드시고 계시네. 생경한 장면이지.
할아버지들이 나누고 계신 이야기는 생각보다 되게 평범해. 오늘 자리에 오지 않은 누군가의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가게 한켠에서 작은 소리로 돌아가고 있는 TV 화면으로 뉴스를 보시다가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셔. 한 분은 유난히 큰 소리로 “아, 저걸 저렇게 하면 어쩌냐” 하시면 그 옆에 분은 “그래도 저러는 편이 낫다” 하시고, 다른 한 분은 “이제 와 저게 다 무슨 소용이냐”라고 작게 말하며 주전자를 난로 위로 옮기셨어.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 말이야. 아니다. 꼭 늙어서가 아니라도 생이 다해간다고 느껴지는 시점에 우리는 무엇을 아쉬워하게 될까? 입을 떼자니 아득해지지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시험이라든가 뒤통수 맞아서 날리게 된 돈 몇 푼, 그런 건 분명 아닐 거야.
고통 완화 치료 센터 환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에 간 적이 있거든. ‘고통 완화 치료 센터’는 임종이 가까워진 사람들을 상대로 치료를 하는 곳이래. 단순히 수명을 조금 연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환자의 정신적인 건강이나 사회적인 관계까지 케어해 주는 곳 말이야. 호스피스 치료나 존엄사에 대한 제도와 서비스가 잘 갖춰지는 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 같아.
하여간, 그 사진전에는 고통 완화 치료 센터 환자들의 사진과 자필 메시지가 한 장씩 있고, 그 옆에 인터뷰 내용이 적혀있었어. 자기 전에 누우면 오늘이나 어제, 그것보다 한참 전의 부끄러웠던 일까지 생각나 이불 찰 일이 생기지만, 오랫동안 잠들 일을 앞두면 그런 것들이 별일도 아닌 게 되나 봐. 하나같이 자기가 사랑줬던 것들, 사랑받았던 것들, 그래서 더 사랑하지 못해 아쉬웠던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더라고.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오래 머물렀던 자리는 Jack이라는 사람 앞이었어. 거의 벗겨지고 조금 남은 머리카락에서부터 눈썹이며 수염까지 온통 백발인 그 할아버지 인터뷰에 글쎄 이렇게 쓰여있는 거야.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은 아내가 아니에요. 1940년대에 만난 일본 여인을 제일 사랑했어요.”
읽자마자 뒷골이 당겼어.
열일곱 살에 만난 친구 여동생과의 추억을 평생 안고 살다가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걸 꺼내놓다니. 나 사실은 그 할아버지 사진 앞에서, “저기요. 할아버지. 이제 와 이런 얘기를 하시는 저의가 아무래도 괘씸하거든요?” 하면서 한참 이를 갈았어. 내가 그러지 못해서일까,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들을 보면 괜히 눈을 흘기게 돼.
그렇지만 그 짧지만 강렬했던 사랑의 기억이 70년 넘는 세월 동안 할아버지를 살게 했을지도 몰라. 더 이상 쥐고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이제라도 그걸 말하고 싶으셨겠지.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말이 있잖아. 그거 너무 무책임한 명언 아니야? 우리한테 웬만해서는 내일이 올 거잖아.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버렸다가 내일이 오면 내일의 나는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야.
이렇게 낙관적이면서 동시에 삐딱할 수 있는 내가 좀 웃기긴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매일을 그렇게 모든 게 끝인 것처럼 힘주어 살기는 아무래도 힘들다는 얘기야. 지금 이걸 쓰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애쓰지 말어.” 하신다. 다른 할아버지가 고민 상담이라도 하신 모양이야. 나머지 할아버지들도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그려. 공연한 데다가 애써서 뭐혀.”, “놔둬. 놔둬.” 하며 손사래 치고 계셔. 그래 맞아. 우리도 공연한 데 애쓰지 말고 실속있게 힘쓰자.
넓은 침대 위에 백발 어르신은 제법 좋아진 몸을 이끌고 창가에 세워둔 작은 화분들에 물을 줄 테니 일 보라 하셨어.
인자한 미소로 노인은 물었네.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냐고. 나는 고장 난 스피커처럼 아무 말 못했네.
뜸을 들이다가 노인은 말했지. 매일 아침 눈을 뜨게 된다면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아끼겠노라.
며칠 뒤 우연히 그 병실 앞을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췄지. 퇴원하셨는지 문 앞 이름표엔 노인의 이름이 사라졌구나.
네가 쓴 이 노래에 대해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들 너무 슬프다고 하더라. 52병동 3호실 문 앞 이름표에서 백발 어르신의 이름이 사라진 것이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결론으로 짐작됐던 거야. 나는 할아버지가 회복된 정정한 몸으로 병원 문밖을 나가시는 모습을 상상했거든.
나는 아무래도 우리에게 웬만하면 내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동안 유지할 건가 봐. 그래서 낙관적이면서 삐딱하게, 희망차면서도 덜 솔직하게 오늘을 살겠지.
그래도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사랑하는 것쯤은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애쓰거나 억척스럽게 굴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꽤 있더라고. 물론 난 더 배워야겠지만. 사랑하며 살아야지. 사랑하며, 살아, 가야지.
- 두런두런 삶의 이완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는, 춘천 커피에서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436830
* 이 원고는 2018年 어반플레이 웹매거진에 '춘천 음악기행' 시리즈로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