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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Jul 12. 2020

두고두고 ; 여러 번에 걸쳐 오랫동안

조양동 26-1

몇 번이나 널 따라 춘천을 들쑤시고 다니는 동안 가장 많이 갔던 곳은 역시 명곡사지, “춘천의 최대 규모, 유일한 음반가게, 시청 앞 네 평짜리 명곡사”. 이제는 다른 친구를 한두 명 데리고 오거나 나 혼자 춘천에 오게 되더라도 명곡사는 꼭 들르곤 해. 도장 찍듯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어디론가 향하는 길을 몇 배나 더 신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

메탈리카와 그린데이 앨범을 좋아했다는 중학생 시절의 네가 사춘기에 시달릴 때 병원을 찾듯 왔다던 명곡사. 네가 친한 형의 엠디 플레이어에서 불독맨션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에 대해 이야기해 준 걸 선명하게 기억해. 불독맨션의 2집, Salon De Musica를 듣고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었나?’ 하고 놀랐었다고 했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세상에 엠디 플레이어라는 게 있었나?’ 하고 놀랐던 거 알아?

형한테 엠디 플레이어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하고서는 그때도 명곡사에 와서 앨범을 샀댔지. 그래, 명곡사에는 없는 앨범이 없으니까 괜히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여러 번 할 필요 없잖아. 절판된 앨범도 찾아서 연락 주시는 아저씨 덕에 제천이나 충주에서도 찾아오는 단골이 있다는 얘기에 나도 아저씨에게 뭔가 찾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나는 늘 눈 앞에 닥친 것들 위주로 절실해지는 사람이라서일까, 여기 명곡사의 진열장만 보고 있어도 손에 쥐고 싶은 것 천지야.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듯 나도 꽤 오랫동안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던 곳이 있었어. 똑바로 걸으려고 애쓰는데도 신발이 비틀대던 나날이었지. 오른발 바깥쪽만 닳아 꺼진 밑창, 누구는 걸음걸이가 잘못됐다 하고 또 누구는 골반이 틀어진 게라고 하더라. 글쎄 나는 그냥 요즘 내 삶이 균형 잡히지 못한 모양이라고 대충 중얼거리면서 그 자리를 빨리 뜨고 싶다고 생각했어.

소란스러운 틈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는데 댓 걸음을 채 못가 뒤꿈치가 다시 마음에 걸렸고 그때 골목 어귀에서 컨테이너 구둣방을 발견한 거야. 아저씨랑 눈이 마주치자 기웃거리는 내 사정을 알아차렸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턱을 위로 까딱하시더라.


나는 냉큼 아저씨 앞으로 가서 "신발이 이렇게 돼버렸는데 이런 것도 수선이 되나요?" 하고 물었어. “되고 말고, 안 되는 게 없다” 고 하시는 아저씨한테 나는 그때도 신발 말고 다른 것들까지 맡기고 싶다고 생각했어. “안 되는 것도 많던데요” 하면서.

들어와 앉으라는 말에 냉큼 피로한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어.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끈끈한 본드 냄새 사이에서 한참 아저씨를 응시하는데 아저씨는 새 밑창을 댄 자리에 본드가 마르도록 신발을 뒤집어 놓고는 직접 만들었다며 구두 한 켤레를 보여주셨어. 곱게 달린 꽃장식에 "여자껀가요?" 하자, 수줍게 웃다가 다시 뒤집었던 신발을 들어 본드칠을 하시던 모습이 아저씨 삶의 균형을 대변하는 것 같았어. 그즈음에 나는 열심히 한 일도 즐거이 한 일도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거든.

그러고 오래지 않아 구둣방 갈 일이 또 생기고 말았어. 멀쩡하던 신발 버클이 길 위에서 뚝 끊어져 버린 거야. 새로 산 신발은 공장에서 주문이 밀렸다며 기한이 한창이고 날씨가 추워지는데 계절감 떨어지는 신발을 꺼내 신자니 영 기분이 나질 않으니 마음이 급해졌지. 좋은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다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투덜거리며 컨테이너 문을 열었어.


아저씨는 나를 기다린 적이 없었겠지만, 세상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드셨어. 서랍장을 한참 뒤지시더니 내일 새벽시장에 나가보겠다는 아저씨를 보며 신발 수선할 일이 잦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건 아무래도 좀 우습지? 신발은 늘 새로 사기 바빴는데 고쳐 신을 수 있다는 게 주는 안정이 너무 크게 느껴졌어. 아주 못 쓰게 되어, 버리는 일은 마음이 많이 쓰리니까.

내가 명곡사에 들를 때마다 카세트테이프를 몇 장씩 사들고 집에 오니까 아빠가 ‘전에 집에 카세트테이프가 많았는데 다 버려 버렸다’며 아까워하셨어. 새로운 것들이 나올 때마다 원래 있던 것은 족족 후지고 한물간 것들 취급받게 되는 일이 많은 것 같아.


그러다 문득 예전 것이 그리워지는 순간도 오고. 빈티지 소품을 파는 곳에 갔다가 죄다 언젠가 우리집에도 있던 것들인데 이제는 비싼 가격표를 달고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다니깐.

우리 지난밤에 카세트테이프나 CD가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기술이 좋아져 무거운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게 되고, 음반을 하나하나 사지 않아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게 된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음악을 소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거라고 네가 힘주어 말했잖아.


카세트테이프나 CD가 있던 시절까지 나온 노래들은 이야기가 있었다며 살아있는 가사가 있으니 소장해놓고 계속 듣고 싶었던 거 아니겠냐고 숨도 안 돌리고 말하는 네 얘기를 들으며 나도 고개를 끄덕였어. 명곡사에서 사간 앨범들을 들으며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던 네가, 이제는 어엿한 음악가가 된 네가 그렇게 열심히 부르는 노래들도 한 줄씩 떠올랐고.

명곡사 사장님은 여기서 음반가게를 하신 지 40년이 다 되어 가신대. 처음 시작하실 때는 이 근처에도 레코드샵이 열다섯 군데나 있었다는데 다들 어디로 가셨으려나. 명곡사를 200년, 300년 하고 싶다는 사장님은 여기 간판을 열심히 지키실 거라 하셨어.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도 있던데요” 하려다가 또 말을 삼켰지. 나도 참 나야, 그렇지?

세상이 갈수록 빠르게 변한다고 느껴. 그래서 가끔은 슬프기도 해. 얼마 전에 길 모퉁이에 있던 그 구두방이 없어졌어. 아저씨와는 작별 인사도 못했네. 다른 곳으로 컨테이너를 옮기셨을까, 고운 꽃장식이 달려 있던 구두는 선물하셨을까 궁금해. 신발 수선이 끝나면 늘 전화를 주셨으니까 나도 아저씨 전화번호를 알지만 나는 오지랖을 떠는 대신 묵묵히 아저씨 삶의 균형을 응원하는 편을 택하기로 했어.

오늘 명곡사에서 테이프를 고르는 동안은 ‘두고두고’, ‘두고두고’ 하며 읊조려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좋은 것들이 앞다투어 나오는 요즘 같은 때에는 새삼스러운 말이네. ‘두고두고 “. 그러니까 두고두고 찾아오고 싶은 곳, 두고두고 듣고 싶은 음악이나 두고두고 쓰고 싶은 물건, 그런 것들의 공통점을 많이 찾아 두려고. 찾아서 열심히 흉내라도 내볼 생각이야. 두고두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면 근사할 것 같지 않아?

' 두고두고 '의 비결 같은 걸 찾게 된다면 다시 명곡사에 와서 너한테도 편지를 한 통 쓸게. 그건 아마 두고두고 다시 꺼내보고 싶은 편지가 될 테지만, 오늘 이 편지는 그렇게 되기는 어렵겠다. 그래도 편지를 주고받는 건 너무 좋아. 이제 곧 계절이 바뀐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 같아. 해가 길어지고 옷 소매가 짧아지는 계절의 어귀, 그 모퉁이에 이 편지를 접어두렴.     


- 김현철의 <왜그래>가 흘러나오는, 명곡사에서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436827

* 이 원고는 2018年 어반플레이 웹매거진에 '춘천 음악기행' 시리즈로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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