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화동 800-30
나 지금 어디에 와있는 줄 알아? 근화동 800-30번지. 밥 짓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소양보리밥이야. 네가 ‘소보’라는 예명이 엄마랑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가게 이름의 줄임말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겉으로 아아 하면서 속으로는 피식 웃었던 거 알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자기네 부모님이 하시는 일의 앞글자를 따다가 예명을 지어 보이기도 했잖아.
그러고 보니 여기 처음 왔던 날도 기억난다. 그땐 춘천이 익숙하지가 않으니 가게가 춘천역에서 이렇게 가까운 줄 미처 모르고 택시를 탔거든. 주소를 불러주며 소양보리밥으로 가달라고 했더니 택시 아저씨가 “여행 온 것 같은데 춘천까지 와서 웬 보리밥이냐”면서 막국수 잘하는 집을 아신다고 유명한 걸 먹으러 가라 하시더라고.
나중에 너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너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우리 가게가 춘천에서 제일 유명한 보리밥집”이라고 했었지. 아무렴 춘천 사람들도 매일 닭갈비나 막국수를 먹지는 않겠지. 근방에서 밥을 드시려는 분들은 다 너희 가게로 오시는 것 같더라. 북적이는 가게 안을 둘러보면서 네가 가진 자부심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어.
14년 넘게 자리를 지키며 동네 어른들 걱정에 가격도 안 올렸다는 보리밥집에 오늘은 부모님을 모시고 왔어. 보리밥 되게 좋아하시거든. 정확히는 엄마가 좋아하셔. 아빠야 엄마 가는 데에 바늘과 실처럼 따라가시는 법이지. 부모님 두 분 모시고 여행하기가 어느 정도의 난이도인지 혹시 알아? 귀한 밥 먹으러 왔으니 그 얘기는 나중에 길게 하자.
푸짐한 밑반찬과 함께 큰 그릇에 밥이 가득 나왔어. 보리밥 반, 흰쌀밥 반 이렇게. 아빠는 ‘보리밥 많이 먹으면 방귀 냄새가 지독해진다’는 농담을 하더니 엄마 밥그릇 쪽으로 보리밥을 많이 덜어주고 당신은 흰쌀밥을 가져갔어. ‘당신 이것도 먹어’, ‘당신은 저거 많이 먹어’ 하면서 밥이며 반찬이며 서로의 접시에 덜어주는 부모님을 보고 있으면 조금도 외롭지 않은 소외감이 느껴지곤 해.
내가 “밥도 더 달라고 하면 더 주시고, 반찬은 세 번까지 리필이니까 양보하지 말고 드세요” 하니까 그제야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한 손에 노가리 조림 그릇을 쥔 채 손을 드셨지. 나물이 담긴 접시에는 비슷한 채도를 하고 비슷한 모양으로 둥글게 오므려진 나물들이 담겨있으니 나는 그 나물이 그 나물이겠거니 싶어 별생각 없이 한 젓가락씩 집어먹었거든.
근데 다 다른 맛이 나는 거야. 내가 당연한 얘기를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나? 입안에 넣을 때 올라오는 향도 제각각, 꼭꼭 씹히며 물리는 식감도 제각각, 그 제각각인 나물들과 보리밥을 한데 섞어 고추장 양념과 함께 삼키니 또 다른 맛이 제각각. 집에서 명절에 남은 나물들을 양푼에 넣고 대충 비벼 먹을 때의 풍요로움이 다시 떠올랐어.
가족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어쩌면 각자 맛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비슷한 듯 전부 다른 것들이 한 그릇 안에서 얽히고 부대끼면서 함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잖아. 전부 보리밥이라고 불리지만 재료나 양념, 요리 방식에 따라 맛이 다른 것도 그렇고. ‘가족’ 혹은 ‘가족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거든. ‘세상에 만 개의 가족이 있다면 거기에는 가족이라 칭하는 만 개의 각기 다른 형태가 있겠구나.’
우리 가족은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양육’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갖지 못할 즈음부터 구성원 각자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양육의 효용과 부작용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누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부모님에게 너무 가혹한 피드백 아니냐고 하더라. 그런가.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는 일도 말하자면 엄청난 프로젝트니 성과를 측정해 보는 일이 재미있지 않아?
할머니 집에서 밥을 먹으면 엄마가 만든 음식과 비슷한 맛이 나듯이 나도 엄마의 손맛을 닮아가고 있겠지. 일찍 아빠를 여의고 소녀 가장처럼 자란 엄마는 전쟁 통에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할머니보다는 덜 억세지만, 굳센 여자로 컸어. 나도 비슷한 정도로 약화되면서 엄마보다는 덜 억세지만, 굳센 여자로 자랐겠지.
할머니가 부쩍 몸이 안 좋아지시면서 서울에 올라오셨고, 몇 주 전부터는 병원에 입원해계셔. 간호도 간호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시겠다고 성화인 할머니를 달래느라 엄마가 고생이 많으시지. 나는 그 사이에서 우리 3대(代)의 공통점을 또 하나 찾고 말았어. 자기 삶을 자기가 오롯이 이끌고 가겠다는 끈질긴 애착.
하루에 고작 한 대 맞는 항생제 주사를 맞겠다고 이렇게 좁은 병원 침대에 누워 몇 주째 따분한 시간을 견디느니 시골집에 가 일찍 죽더라도 마늘밭에서 뒹굴다 가고 싶다는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친척들은 링거가 꽂힌 할머니 팔을 잡고 흔들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 나라도 그래. 말할 것도 없이 엄마도 공감하시겠지.
엄마는 또 어떻고. 중년의 사춘기라 불리는 갱년기가 찾아왔을 때 호르몬의 변화와 참을 수 없는 고독감에 몸부림치던 우리 엄마는 마침내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내려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대. 근데 그러다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스스로 찾았다나. 그런 이야기를 딸인 나한테 담담하게 하는 게 우리 엄마야. 크게 놀랄 것도 없이 나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던 일들로 대화를 이어가는 게 나고.
이렇게 가족 단위 안에서 받게 되는 영향을 피부로 느끼고, 거기에 관심이 많은 내가 벌써 아이를 낳은 친구들에게는 “애들은 알아서 크는 거니 너무 벌벌 떨지 말라고” 무심한 척 떠들고 다니는 건 웃기는 일이지? 하지만 세상일의 대부분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더라고. 보리밥을 먹을지 쌀밥을 먹을지, 자기 그릇에 어떤 나물을 넣고 양념은 얼마나 퍼넣을지 자기가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야.
5월의 마지막 날이네. 가정의 달 같은 건 누가 정했을까? 모르긴 해도 가정의 달이나 어버이날 같은 걸 만들어 놓길 잘한 것 같아. 제각각 자기가 결정하고 책임지면서 끌고 가야 하는 녹록지 않은 인생 속에서 기념일처럼 가족들을 돌아보고 챙길 타이밍이 주어지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계산을 하려고 일어섰는데 어머님이 돈을 안 받겠다 하셔서 카드가 몇 번이나 내 손에 왔다 어머님 손에 갔다 했어. 다음에 또 오라고, 그때 와서는 계산하라고 하시니 그래야겠다. 그땐 할머니도 모시고 오고 싶어. 그러려면 어서 쾌차하셔야 할 텐데. 여기 와서 보리밥 한 그릇 거하게 드시고 마늘밭에서 실컷 뒹구시는 날이 곧 오겠지? 그때 여기서 다시 편지를 쓸게.
- 후식으로는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소양보리밥에서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436822
* 이 원고는 2018年 어반플레이 웹매거진에 '춘천 음악기행' 시리즈로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