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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kimkim Mar 07. 2023

개발자가 되기까지 16년 (2)

기다리다보면 기회가 올 때가 한 번은 있다.

대학 생활

내가 졸업한 대학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경찰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듣기로는 시위 진압을 할 소대장들이 필요하기도 했고, 대졸자가 경찰에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경찰대학는 육군사관학교를 완전히 본따서 설립했고, 복식이나 생활도 완전히 동일했다. 졸업식 행사 준비 때 홍보실에서 우연히 경찰대학 3기 쯤에 발간된 '경찰대학 요람'을 발견했는데, 그때 전설로만 내려오던 '1학년의 덕목은 인내와 복종이다'이라는 글귀를 발견하고 놀랐던 적이 있다.


대학은 설립 30년이 지나 내가 있던 시기에도 바깥세상과 전혀 동떨어진 시대에 있었다. 이런 문화가 유지되는 이유에 있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학교에 배치되는 생활 지도교수들이 자신들이 다뤘던 의경들처럼 학생들을 다룬다는 설이 있었고, 대학 본부의 경감, 경정들이 자신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문화를 기준으로 지침을 내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짧게 줄이자면 복학왕의 기안대 같았다.


이런 학교 생활은 하루하루가 숨 막혔는데, 북한에 살면 이런 생활일까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모두 화가 나있었고, 학년이 모든 것이었으며, 징계처분들은 결론이 미리 내린 후 이유를 만들어나갔으며, 그 처벌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을 만들어냈다. 이런 사람들이 졸업해서 경찰이 된다는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었다.


여기에서 지능과 도덕성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고, 군중 속에 섞여 있으면 개인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사리분별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누구라도 문화에 속해 있으면, 그 문화에 전염되어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도 못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오늘 아침 우유가 초코우유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는 4학년이 있다고 한다면, 학교 밖의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각자 다르다. 학교를 자퇴하는 사람도 있고, 대외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도 있고, 고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4년 동안 술만 마시거나 게임만 하는 사람, 학교 성적에만 집중하는 사람 그리고 이런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학교를 나가고 싶었지만, 삼수를 또 하기는 너무 싫어서 그냥 체념하고 다녔다. 학교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곳이다. 인풋이 좋아서 그나마 아웃풋이 유지되는 곳.


창업

학생은 창업이 당연히 불가능했고, 외부와의 인터뷰도 사전 허가가 필요했다. 2010년에 아이폰3와 갤럭시S를 필두로 스마트폰이 완전히 대중화되면서, 앱 개발이 엄청나게 각광받았다. 이 때 수험생 어플리케이션을 하나 개발 외주를 시켜서 2년 정도 운영했는데, 별도 마케팅 없이 운영으로만 가입자수를 2만명 가까이 모았다. 직접 개발을 하진 않았지만 3-4차례 업데이트를 하면서 여러 기능들도 추가했었다.


이 앱은 수험생이 아침에 깨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미션 앱으로, 연속해서 미션에 성공하면 쌓이는 포인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렇게 얻은 포인트로 매달 포인트 옥션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운영비는 당연히 내 사비로 나갔다. 개발비와 운영비를 합쳐 2년동안 약 3천만원 정도를 썼던 것 같다. 물론 앱은 무료였으니 돈이 술술 나갔고 대출을 받아 운영을 해나갔다. 최종적으로는 앱을 판매하고 Exit을 하고 싶었다.


3학년 겨울이 올 무렵에, 유명 신문사에서 수험생 어플리케이션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위해 지도실에 앱의 존재를 알렸고 며칠 후에 앱을 삭제해야만 했다. 생각해보면, 인터뷰를 먼저 해버리고 징계를 받는게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 조직은 절대로 아웃라이어를 존중해주지 않는다.


4학년 겨울에는 창업 대신 학교 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지도실이 먼저 요청을 했는지, 내가 먼저 건의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맥북 두 대와 아이폰 두 대를 지원받는 대신 학생 어플리케이션을 동아리에서 제작해주기로 했다. 이건 학교와 우리의 이해관계가 딱 잘 맞아떨어져서 아주 성공적으로 잘 돌아갔다.


사이버 수사

그나마 경찰에 사이버 수사라는 분야가 있다는 건 참 다행이었다. 물론 경찰대 출신 중에 완전히 엔지니어인 사람은 없다. 대부분 정책을 다룬다. 하지만 컴퓨터와 접점이 있는 유일한 분아였다. 그래서 사이버 수사 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사이버 수사 동아리는 학교보다 분위기가 훨씬 자유롭고 괜찮았다. 이 시기 사이버 수사는 디지털 포렌식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는데, 프로그래밍과는 거리가 멀고 암기 위주의 내용이라 흥미가 가진 않았다. 대학 3학년 때 BOB라는 프로그램이 처음 시작되면서, 학교의 지원을 받아 반 년 정도 사이보 보안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만났던 사람들과는 많이 친해졌지만 이쪽 분야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대학 4학년 여름방학에 새로운 학장이 부임하면서, 기존의 대학원 파견 제도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기존의 성적 순이던 방식에 특성화 TO를 할당하면서 나같은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학교에서는 컴퓨터 공학을 아는 사람도, 정보보안 교육을 받은 사람도 나 뿐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학원은 내 생각과는 또 완전히 달랐다. 그곳 역시 소수의 인재가 다수의 인원을 책임지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나랑 정말 맞지 않는 분야라는 것을 느꼈다. 이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의미가 없던 시기로, 차라리 빨리 군복무를 끝내고 2년 빨리 퇴직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한다.


기동대

대학원을 마치고 기동대 소대장으로 군복무를 시작했다. 출동을 나가지 않는 시설경비라 나름 수월했지만, 2교대 당직근무라 피로했다. 물론 현역에 비하자면 수십배의 급여와 대우를 받는 출퇴근직에다가 경찰 호봉도 산입되니, 경찰로서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엄청난 혜택이었다.


물론 그 대가로 4년의 대학생활을 바쳐야 한다. 이공계에서는 병특으로 취업해서 커리어 공백을 전혀 없앨 수 있으니 엄청난 특혜도 아닌 셈이다. 차라리 서울대를 가서 병특을 했으면 인생에 막힘이 없었을 텐데, 대학 4년과 대학원 2년과 기동대 2년으로 8년이 뒤쳐졌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물론 모든 것이 나쁜건 아니다. 선택의 중요성을 배웠고, 서울대를 갔더라면 못 만났을 사람들도 만났다.


기동대는 경찰 생활의 시작점이었고, 대학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조직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조직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특징이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생활이 힘들다. 당장 앞에 주어진 목표를 보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온 힘을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적합하다. 그 일을 왜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이다.


일을 잘하는 것과 승진은 또 다른 이야기다. 평가는 해당 계급의 임용 시기로 줄을 세워서 나눠주고, 시험은 셀프로 공부해야한다. 같은 부서에 다들 줄을 서 있기 때문에 그 년도에 승진자가 나오지 않으면 1년을 또 기다려야한다. 이런 압박은 졸업 후 몇년 후부터 시작된다. 학교에서는 학년별로 줄을 세웠지만, 조직에서 계급 순번은 학교 졸업 순이 아니다. 기수가 높은데 계급이 낮고 기수가 낮은데 계급이 높은 사람이 한 부서에 있으면 서로 불편하다. 눈치를 안볼래도 안보기가 참 힘들다.


퇴사 결심

조직에도 전문가들이 있지만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사기업에서 몇 배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희생해서 조직은 굴러간다. 전문 인력을 위해 특채를 뽑지만 유능한 사람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조직에서는 계급이 가장 중요하고, 계급이 조직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계급 대신 좋아하는 분야를 좇았다 후회하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들릴 때도 있다.


퇴직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로스쿨 전만 하더라도 고시합격을 제외하면, 퇴직은 드물었지만 초기 로스쿨에 진학했던 동문들의 성공담이 들려오면서 너도나도 로스쿨로 향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대 출신 변호사는 희귀했고, 로스쿨 입시 난이도나 변호사 난이도도 지금보다 쉬웠기에 일찍 움직인 사람들은 정말 좋은 결정을 한 셈이다. 빅펌 신입 변호사와 초임 경위는 못해도 3-4배 이상의 세전 급여 차이가 난다.


조직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선택지들이 있었다. 승진을 준비하거나, 로스쿨을 준비하거나, 주식이나 코인을 하거나, 아무 생각없이 머리를 비우고 살거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진 못했다. 전문성을 기르는 것은 선택지엔 없었다. 남고 싶다면 다시는 컴퓨터랑 관련된 어떤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이직에 실패한다면, 승진 공부를 할 생각을 했다.


돈도 문제였다. 사람들이 계급보다도 돈을 더 부러워했다. 뻔한 공무원 월급이니 사람들은 재태크에 관심이 많았고 코인 붐이 일었을 때는 온 사무실 직원이 출근 후에 코인에 빠져있었다. 그것 외에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 말이다. 반면 돈이 많은 사람들은 여유롭게 직장 생활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금 외에 은퇴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코딩 인터뷰

퇴사를 결심했을 때 바로 튀어나올 수 있었던 것은 코딩 인터뷰 덕분이다. 그때 나는 왜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여러 코딩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Google CodeJam을 시작으로 Facebook Hacker cup과 같은 해외 대회가 있었고, 국내에서는 삼성 SCPC나 LG의 Code Monster와 같은 대회들이 열렸다. 카카오에서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내가 지원을 할 당시의 신입 면접에서는 코딩 테스트가 거의 전부였다. 리쿠르터들이 내 출신 학교와 코딩 테스트 경력을 신기하게 여긴 덕에 나는 서류 전형을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면접에서는 코딩 테스트는 아주 쉽게 풀어냈지만, 도메인 지식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면접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고, 면접관들이 도메인 지식은 입사 후에 배우면 된다고 말해준 것도 참 인상적이었다.


이런 채용의 트렌드 또한 코딩 테스트에서 과제 중심 테스트로 옮겨가고 있다. 코딩 테스트가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이 백준이나 Leetcode로 몰려들고 있으며, 난이도 또한 점차 상향 평준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 때는 채용 문이 엄청나게 넓었지만, 지금은 채용 시장이 완전히 얼어 붙었다. 세상 어떤 일이든 타이밍과 운이 아닌 것이 없다.


퇴사 통보

이후 절차는 아주 쉬웠다. 7급 이상의 공직자는 퇴사를 할 때 재취업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구글은 그 대상 업체 목록에 없었기에 나는 아무 제한도 없이 바로 이직할 수 있었다. 경찰서 경무과에 들러 퇴직을 통보하고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후로는 제복과 흉장이랑 공무원증을 반납하고 얼마 후에 퇴직했다.


사람들 반응은 호의적이었는데, 로스쿨이 아니라 듣도보도 못한 루트로 나가는 것이 신기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21살부터 29살까지 8년 좀 넘는 시간을 보낸 후에 나는 구글에서 개발자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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