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한 서울 생활, 구글 오리엔테이션과 나름의 적응기
앞선 글에서와 같이 10년의 우여곡절을 거쳐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구글에 합격했다. 면접을 보려고 처음 방문한 GFC는 너무너무 멋있었다. 거대한 정문의 거대한 회전문. 왠만한 호텔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정말 여기에서 일하고 싶다. 붙여만 준다면 나는 기어서라도 출퇴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지만 그만큼이나 내가 살던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첫 출근은 참 긴장됐다. 나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공채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동기라는 개념도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에서는 간단한 교육과 출입증 사진 촬영, 노트북, 연봉 계약서 같은 것들을 받았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소속된 팀으로 배정되어 엔지니어들과 인사를 나눴던 것 같다.
처음 느낀 회사의 분위기는 참 자유로워 보였고, 모든 사람들이 다 친절해보였다. 식당은 정말 화려했고,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 상상속의 미국 같은 느낌이었다. 항상 모두가 화나있고, 갑갑한 분위기였던 공무원 조직이랑 비교했을 때 나는 탈북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공무원 조직에서 하던 것처럼 수동적이고 눈치를 많이 살폈던 것 같다.
이런 문화 차이는 인적 구성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시스템의 차이에 있다. 군중심리에 따르면 집단 내에서 개인의 성격과 사고는 몰개성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문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잘 설계된 시스템은 모든 구성원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고, 나쁜 시스템은 모든 구성원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아무튼 내가 마주친 구글의 첫 모습은 이런 점에서 아주 잘 설계된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2018년 당시 오리엔테이션은 구글 본사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나는 입사를 하자마자 그 주 주말에 미국으로 바로 출장을 떠났다. 그때 입사시기가 비슷해 같이 오리엔테이션을 떠난 사람이 두 명 정도 있었는데, 다행히 잘 맞는 사람들이라 같이 여행도 다니고 많이 놀러다녔다.
그와 별개로 오리엔테이션 자체는 정말 스트레스였다. 지금도 영어는 힘들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알아듣는 내용이 없었다. 텍스트나 오디오나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거니와, 내용 자체도 너무 복잡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 매우 절망적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의 내용들이 내가 실제로 할 일들과 관계가 없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돌아간 이후가 참 걱정이었다.
미국 자체도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운틴뷰는 정말 낙후된 시골이었고, 뉴욕은 그냥 더러운 도시였다. 정작 미국에 와보니 서울은 참 살기 좋은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음식도 마음에 들지 않아 거의 햄버거를 먹으면서 살았다. 얼른 한국에 돌아갈날만 생각하며, 한 달을 버텼고 다시는 오지 않기라 마음을 먹었지만 3년후에 나는 이곳으로 트랜스퍼를 오게 된다.
물론 회사 문화는 괜찮았다. Sunnyvale 오피스에는 야외 수영장도 있고 거기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참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매 강의마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기가 궁금한 점들을 질문하는 점도 나는 참 신기했다. 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소심해지는 법만을 배워온 사람 같았다.
애초에 회식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회식 문화라고 할 것도 없다. 첫 회식은 아마 인턴십 마지막날에 인턴분들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던 것 같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몇몇분이 그냥 가방을 들더니 그대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 부분이 참 충격적이었다. 그때의 경찰 회식은 비번자도 전화로 불러내기도 하고, 보통은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향하고 그랬다. 물론 나는 그런 회식 문화를 즐겨했기 때문에 이건 나에겐 별로 좋진 않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프로그래밍 도메인 베이스가 없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구글은 대부분의 인프라 시스템을 자체 개발했기 때문에, 바깥 도메인 지식이 있더라도 배워할 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정말 힘들었다. 우리 팀의 프로덕트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젝트 설명만 듣고 일을 시작하는 건 마치 어둠속에서 걷는것처럼 막막했다. 만약 지금 팀에 합류한다면, 문서를 대충 쭉 읽어보고 팀 사람과 1on1을 잡아서 궁금한 점들을 쭉 물어보면서 ramp up을 했겠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저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모르는 것들과 막히는 부분들을 스스로 해결했다.
이런 방식은 정말 좋지 못하다. 당장 이 프로젝트는 시간을 갈아넣어 해결되었지만, 또 다른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이 만큼의 노력이 들어간다. 물론 한 팀에 쭉 있게 된다면 점차 프로덕트에 대한 지식이 쌓여 한결 수월해지겠지만 만일 새로운 팀에 간다든지, 혹은 다른 팀과 함께 프로젝트를 한다든지의 상황이 되면 문제에 빠지게 된다.
나는 첫 팀에서는 이런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활용하지 않았다. 만일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장 큰 공포는 영어였다. 첫 팀은 모두 한국인 팀원인 덕분에 다행히 회의에서는 한국말을 썼다. 이것도 장기적으로 좋은 건 아니다. 주니어때 이런 경험을 쌓지 못하면, 시니어가 되어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때는 심지어 회의를 주도해야 하는 상황인데 영어를 못한다면 얼마나 큰 창피인가.
물론 한국인 팀인 것과 별개로 문서나 이메일은 모두 영어로 작성했기 때문에, 어찌됐건 영어는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영어 스트레스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고맙게도 영어 회화 수업 지원을 해줬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 회화 수업과 실제 영어에는 큰 괴리가 있다. 특히 회의나 스몰톡은 전혀 다르다. 외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일하는 것만이 공포를 극복하고 실력을 늘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지 못했던 덕분에 한 2년 정도는 편하게 살았지만, 그 이후로는 고생을 조금 했고 미국에 와서는 정말 고생을 많이했다.
예전에도 서울에 오래 살긴 했지만, 서울은 참 살기 팍팍한 곳이다. 나는 출근 지하철은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회사 근처에 집을 구했다. 강남은 서울 중에서도 유독 비싸고, 좁고, 열악하고, 시끄럽고, 위험하다. 주거의 질에 있어서는 최악이지만 나는 출근 하나를 위해 모든 것들을 다 포기했다.
그나마 괜찮은 방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복불복이었는데, 1년차에 살았던 방은 그 중 최악이었다. 위에서 말한 모든 안좋은 점들에 해당되는 방이었다. 강남의 대부분의 방들이 그렇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미개한 곳에서 살았나 싶다. 사실 시설도 미개했지만 미개한 이웃들이 훨씬 많았다. 어차피 세입자는 넘쳐나니 집주인들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서울이 인프라가 좋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20대를 제외하면 뭐가 좋은지 난 잘 모르겠다. 20대야 술먹고 놀 곳이 많기 때문에 좋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직장 문제만 아니라면 굳이 서울에 살고 싶어할까. 지방에 내려가면 집값도 싸고 모든 것이 좋은데 다만 좋은 직장을 구하기 힘들다. 예술 공연이나 의료 인프라도 서울에 집중적이긴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매일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지방에서 서울 접근성이 워낙 좋기 때문에 나는 가장 큰 문제가 직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첫 해는 참 어려운 한 해였다. 새로 태어난 것 마냥 완전히 낯선 환경에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채로 던져져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했던 한 해였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미화가 된다는데, 그럼에도 힘들었다고 기억하는 걸보면 어지간히 힘들나보다. 그래도 확실히 버티다보면 조금은 나아진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은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