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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Mar 21. 2022

다시 한 번 그대의 삶을 버텨내길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보스턴에서 아파트 관리원으로 일을 하며 의미 없는 하루를 살고 있는 ‘리’는 갑작스런 형 ‘조’의 죽음으로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 맨체스터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묻어두었던 그의 상처가 조금씩 곪아 터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조’가 없는 삶을 버텨내야 하는 ‘리’와 ‘패트릭’의 일상을 참 담백하게도 그려냈다.

아버지의 부재보다도 하키가, 밴드가, 친구들이 없을 삶이 더 자신 없는 ‘패트릭’

그런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주지도, 그렇다고 내치지도 못한 채

‘패트릭’의 일상이 지속되도록 그의 운전기사가 되어주는 ‘리’


어쩌면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가끔 냉동닭을 보며 영안실 냉동고 속 아버지 모습이 겹쳐져 엉엉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최고의 sf 영화는 스타트랙이라 외치는 친구들에게 웃음을 보일 여유를 가져야한다.

쩔쩔매며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상대방을 위해 형의 죽음을 담담히 먼저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형과 함께였던 바닷가(따뜻했던 과거)는 이제 수많은 유리창으로 가로막혀있다.

그가 무수히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그럴수록 그의 손이, 그의 얼굴이, 그의 마음에 상처만 늘어날 뿐이다.

그렇게 ‘맨체스터’는 그에게 상처로 기억될 뿐이다.

그럼에도 그저 ‘베었다’라 거짓말을 하며 살아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기보다 ‘괜찮아’를 반복하며 버텨내야 한다.


상처로 뒤덮인 그의 무덤덤한 삶을 바라보며 문득 난

‘지난 한 해를 버텨내느라 고생했어. 부디 올 한해도 잘 버텨내길.’이란 문장으로

가까운 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던 나를 돌이켜봤다.


‘축하해’라 하기엔 삶은 늘 축제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나날들.

‘응원해’라는 말보다 더 큰 응원이 필요했던 나에게 

‘버텨내느라 고생했다’란 한마디에 꾹꾹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날 이후, 누군가 살아낸 삶이 대견할 때 그때의 내 마음이 당신에게도 닿길 바라며 

‘버텨내느라 고생했어.’란 말을 건네곤 했는데

오늘 이 영화의 리가 지닌 무게를 마주한 순간 '버텨내'라는 말이 어쩌면 이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란 생각이 들었다.


“못버티겠어. 미안해”라 고백하는 리의 모습에 머리가 띵해졌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마저도 ‘리’의 상처를 외면했었다. 그저 ‘패트릭’의 일상을 그가 지켜주길 바랐다.

‘리’는 어른이니까 어린 조카의 삶을 지탱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도 ‘패트릭’도 ‘리 자신 스스로’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다.

‘더 이상 못버티겠다’란 그의 담담한 고백에 비로소 상실을 온전히 마주하며 살아낸 그의 삶이 보였다.

제대로 소리쳐보지도 울어보지도 못 할 만큼 온 힘을 다해 버텨봤기에 할 수 있는 고백이었다.


삶을 축하해야 하는 순간에 ‘버텨냄’을 응원하고 있다니...

각자의 삶의 무게는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응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난 다시 나의 소중한 이들의 생일에 ‘버텨내느라 고생했어.
다시 한 번 열렬히 버텨줘.’란 이기적인 축하와 응원을 할 것이다. 
그 이기적인 마음이 당신에게 닿아
부디 패트릭을 위한 쇼파배드 구입하는 용기(따뜻함, 희망)를 이끌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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