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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좐 Oct 20. 2023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나의 스페인행 티켓, 2017

일주일 간격으로 두 명이 쓴 글을 읽었다. 긴 글 속에 문장 하나씩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돈이 없어 아무런 약속도 잡지 못했던 삶’ 

‘돈이 없어 한 달 내내 계란밥만 만들어 먹었다’ 


각각 호주와 유럽에서 생활하고 있는 두 명의 한국인이 쓴 글. 둘의 글에는 ‘돈’이라는 공통적인 고민이 있었지만, 돈이라는 한 단어로 대충 정리해 버리기엔 그 무게감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잔고가 7300원쯤 남아 있는 통장에 3000원을 입금하고 다시 만 원을 인출하고서 마냥 행복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지만, 그게 타지에서의 삶이라면 느낌이 조금 달라진다. 


서른이 넘어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타지에서 살아간다는 것. 스스로 경제적인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국과 크게 다를 게 있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분명 다르다. 일상에 지쳤을때술한잔청할 수 있는 친구가 가까이에 있는 삶이란 건, 자고 일어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는 환경에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두 사람의 문장에 각각 담겨 있는 일상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도 그랬다. 일단 스페인에 오기는 했지만 사업이란 걸 해본 적이 없던 나는 무작정 집을 얻었고, 집구석구석을 채워 방한칸짜리 여행 자 숙소를 운영했다. 그리고 그즈음 지인을 도와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그 일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쓰고서 6개월 동안 번 돈이 30유로였다. 몇 달 만에 번 첫 10유로를 유리병에 예쁘게 말아 넣으며 ‘이 10유로를 꺼내 써야 하는 일만은 오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고, 몇 달 동안 계란밥만 만들어 먹었다. 다행히 콩알만 한 집에는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여행자들이 다녀갔고,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면서부터 버는 돈과 쓰는 돈의 규모가 비슷 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리병 속의 10유로는 여전히 유리병 속에 남아있다!! 단 한 푼도 저금하지 못하지만 단 한 푼도 허투루쓰 지 않고 살아내고 있다는 감동은 생각보다 컸다. 


1년을 채우던 겨울에 비로소 모든 마음을 비웠다. 이 도시에 있는 동안이 아니면 안 될 일들을 하나씩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공간과 내 시간이 필요했다. 여행자 숙소를 닫았고, 다른 분과 함께 하던 일에서 빠져 홀로 서기로 했다. 일단은 먹고살아야 했기에 하루에 한 팀만 받아서 혼자 가이드를 했다. 


첫 손님은 역사 선생님과 선교사 부부였는데 이틀 내내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그분들이 고쳐주는 것이 훨씬 많았던 아찔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가이드가 아주 조금씩 알려지더니 1년 가까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가이드를 하게 됐다. 주말도 없었다. 손님들은 하 나같이 나에게 말했다. “사람을 더 받거나, 돈을 더 받아요.” 그럴 때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방값과 밥값만 벌면 되는걸 요. 처음 바르셀로나 한글 지도를 만들어서 공개하고 엽서를 만들어 나누었던 게 그때의 일이다. 


경제적인 걱정을 비로소 덜게 된 시간들이었다. 조금 욕심이 난 나는 여름 성수기를 앞두고 소규모 단체 투어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한 팀만 받겠다던 다짐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게 왠지 부끄러워진 나는 결국 투어비를 더 내렸다. 장사할 팔자는 아닌 거다.) 생각보다 예약이 늘면서 팀원을 추가로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명씩 늘어난 팀원이 네다섯을 유지하게 되었고 우리는 어느새 바르셀로나에서는 제법 칭찬받는 투어 팀이 되어 있었다. 사실 팀원이 늘었다는 게 통장 잔고가 늘었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그동안 자리 잡은 프로그램을 통해 혼자 먹고살던 것이 다섯이 먹고살 수 있는 만큼이 되었다는 의미,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휴일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2년을 채우던 즈음 다시 바르셀로나로 떠나오며 빌린 돈을 대부분 갚을 수 있었고, 비로소 내 시간이 생겼다. 하지만 통장 잔고가 조금 생겨나면서 오히려 걱정이 늘었다. 나중이 걱정되기 시작한 탓이다. 겨울이 지나고 비수기 보릿고개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불안함이 밀려왔다. 


그때부터 틈틈이 알바를 한다. 주로 사진을 찍고, 가끔 코디네이트를 한다. 그런 일상들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돈이 떨어질 즈음이면 신기하게도 지인들이 새로운 일을 소개해준다. 사진이 맘에 든다며 찾아주는 여행자도 늘어간다. 어떤 식으로든 바르셀로나를 다른 이 와 나누는 일은 여전히 신나는 일이고, 오랜만에 전공을 살린 작업도 신이 난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그래도 넌 바르셀로나에 있잖아”라는 말만큼 섭섭한 말도 없다. 유유자적 여행하듯 살아보겠다고 온 건 아니니까. 먹고사는 건 그곳이나 이곳이나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 게도 어떤 때에는 그것이 가장 힘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이젠 언제라도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가면 당장 생활은 어쩌지’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내가 이 도시에서 지난 몇 년 간 얻은 게 있다면 한국에서도 그렇게 천천히 살아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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