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일기 vs 엄마일기
1980년생 여자가 쓴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일기 속에서 공통된 스토리를 뽑다.
제주도
99년 6월 5~6일
한라산에 올랐다. 죽겠다. 숨이 차고 덥고 머리가 핑핑 돈다. 엄청 울었다. 결국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삼킨 눈물의 도시락. 하산. 한라식물원. 횟집. 저녁은 맛있고 쫀득쫀득한 돔회
둘째날. 호텔 같지 않은 호텔에서의 아침식사. 비가 내린다. 폭포 앞에 도착했지만 비 때문에 돌아서다. 만장굴로 이동. 우비를 입고 긴 동굴을 걷는다. 으. 추워. 동굴을 나와서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제주민속마을 관광 후 똥돼지 점심식사. 맛은 그냥 그랬다. 다음 코스는 여미지식물원. 전망대에 올라가고 열차도 타고 열대나무 아래서 사진도 찍었다. 다음 코스 몽고인 . 쌩쌩한 몽고의 네 젊은이가 말을 타고 서고 달리고 끌려가고 묘기를 부렸음.
제주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 맛있는갈치찜과 갈치구이. 바쁘게 저녁을 삼킨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제주공항 출발 - 김포도착- 우리집. 너무 벅찬 00무역회사 1박 2일 야유회.
2009년 6월 15~19일
사람들은 요즘 다들 제주로 떠난다. 나도 싸이월드 00클럽을 통해 제주 올래를 다녀왔다. 모르는 다수의 사람과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비용 절감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1년 전엔가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서울에서 잡지사 편집장으로 일하는 어떤 여자가 모든 것을 접고 자기 고향 제주도에 내려간다는 내용이었다. 속으로 별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바로 올래 코스를 개척한 서명숙 이사장이다. 숙소 사장님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동행....
여행을 함께 떠나는 사람. 그 사람을 잘 만난 것 같다. Z씨는 나의 챙 넓은 모자가 날아가면 뒤에서 잡아주고, 사진 찍기 부적합한 크로스백은 알아서 감춰주는 묵묵한 남자다. 함덕 해수욕장 사진을 보면 말 없는 Z씨도 웃고 있다. 누가 에메랄드 같은 함덕 해변에서 인상을 쓸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해변을 남편 없이 혼자 즐긴 것도 미안하다. 그러나 가끔 이기적일 필요도 있잖아?
제주 여행을 핑계로 회사에 사표 썼으니까 이제 난 대책없는 백수다. 헉. 남편 외벌이 시키고 곧 굶어죽는 거 아니야? 아니야. 이제부터 우리 부부의 진짜 신혼이 시작된다고 믿는바다. 신혼의 아내가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남편에게 감사를 전한다.
2011년 1월 12일
오랜만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자친구 Z씨도 잘 있냐고 겸사겸사 물었더니 죽었단다.
지난 8월에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너무 놀라서 한참 동안 답장을 못했다.
제주도에서 처음 만난 Z씨는 친구와 나에게 완전 ‘우리’ 스타일이었다.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처럼 훅,하고 불면 한권의 책이나 시집이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 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린 바람처럼 돌하르방처럼 지내온 사이다.
돌하르방...
Z씨와 들렀던 제주 초콜릿 가게에서 아줌마는 돌하르방 두 개를 선물로 주었다. 내가 하나 더 갖고 싶어하니까 그가 자신의 것을 양보했더랬다. 여행에서 돌아와 돌하르방 셋을 책장 위에 올려 놓고 뿌듯해한 기억이 난다.
두 개는 남편과 나 같았고 하나는 언젠가 태어날 우리 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진짜 아기 ‘환희’의 출산 소식을 전하려니 그가 세상을 떠났단다.
Z씨는 지금 어디 있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랑하는 내 친구를 두고 떠났을까. 마치 제주도의 바람 같았던 그에게 감사함과 그리움, 미안함, 참 보고 싶다는 인사를 전한다. Z씨. 참 보고 싶네요.
1999년. 회사 야유회로 제주도를 처음 다녀왔습니다.
2009년. 제주 올래 열풍에 합류했습니다.
2011년. 올래 청년 Z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작게 보면 저의 일기지만 크게 보면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이기에 케케묵은 일기장을 펼쳤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문창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