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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too Feb 09. 2018

우연히, 그곳에서...<95화>

[ 제95화 _ 이곳이라서, 함께여서 다행이야...!! ]

카와모토에게 구매를 확정하고 무려 선금까지 입금하겠다며 강한 욕구를 드러낸 고객.

자신을 일본인이라 밝힌 그 고객 덕에, 카와모토는 잠시 잊고 살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떠올렸다.

카와모토가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을 떠나 온지 어언 3년. 

예술의 열정만으로 조국을 뛰쳐나온 후, 다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립거나 하는 등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연히 맞이한 일본 이야기에 문득 회상에 잠긴 카와모토는 핸드폰을 꺼내어 예전 사진을 뒤져 보았다.

열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옛 연인과 함께 한 사진.

예술적인 열정을 핑계 삼아 사기꾼이 되어버렸기에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옛 연인, 바로 아영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일반적이지 않지만 통통 튀면서 연애에 있어선 크게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

아영과 같은 여자 친구가 곁에 있는 것은 더없는 행복이었지만, 카와모토에게는 항상 꿈이 우선이었다.

철썩 같이 남자친구를 믿고 별 고민 없이 돈까지 빌려주었던 여자친구 였건만...

이제는 사기꾼으로 인식 되어있을 자신의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상태로 말없이 사라진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란 기대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카와모토는 괜스레 꺼내어진 고국의 추억에, 젖어드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보내온 메일에 답을 달았다.

[ 반갑습니다. 일본 분이시군요. 현재 저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저도 사실 일본인입니다. 장소가 근처라면 원래 실물을 보고나서 구매의사가 있으실 때 선금을 입금해주시는 것이 맞습니다만, 먼저 입금을 해 주시겠다 하니 제가 실물을 들고 직접 일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
 
일본을 떠나 올 때부터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라고 선언했었기에 이 잠깐의 귀국도 카와모토에게는 큰 결심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상황이 작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기 암시를 억지로 만들어 내며 카와모토는 귀국준비를 서둘렀다.





***





"해인아, 이 부분은 조금 더 옅게 가는 편이 좋을 거 같구나. 뒤쪽 묘사를 생각해서...”

“예...! 선생...아니 사장님...!!”

아를의 레스토랑 사무실 안의 작업실.

몇 번을 청소해도 다 빠지지 않은 몇 십 년 묵은 퀴퀴한 냄새가 남은 이 공간, 

그렇지만 두 사람의 그림들을 벽면에 진열해두어, 이곳은 이제 꽤나 그럴 듯 해 보이는 작업실 형태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 공간 속, 이제 명실공히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된 이 콤비.

간간이 들리는 대화와 그림 그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대체적으로 고요한 풍경의 작업실 안과는 달리,
작업실 밖은 몹시나 소란스러웠다.


“어서 오세요...! 예, 저 앞자리 앉으시면 됩니다...!”

“예? 아 토마토 파스타하나랑? 갈릭 오일 파스타요, 예 주문 받겠습니다...!”

분주한 점심 시간대의 레스토랑. 
정작 레스토랑에는 세현만 혼자 바빠 레스토랑을 종횡무진하며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아, 진짜... 이 양반들 바쁜 시간에 뭐하는 거야...!!”

세현은 잠깐의 틈을 타 사무실과 연결된 작업실로 잽싸게 달려 들어가 다정한 스승과 제자를 나무랐다.

“저기요!! 바쁜 시간에는 일들 하셔야지!! 뭡니까? 홀에 지금 손님들 많이 들어왔는데...!!”

“어허! 신성한 예술 활동의 장소에 들어와 무슨 소란이야! 세현이 네가 다 커버할 수 있잖아! 
네가 알아서 해!!”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게 해준 감사의 의미로 레스토랑 일을 돕겠다고 말했던 해인. 

그러나 오히려 20여년간 손을 놓고 있다가 다시 불붙기 시작한 아저씨의 시도 때도 없는 그림 지도 열정 덕에, 근무 중 언제라도 아저씨가 부르면 들어와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한눈 팔면 땡땡이를 치는 레스토랑 오너와 오너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직원 겸 제자 덕에
레스토랑에서 제일 바빠진 건 세현.

“참, 나... 이러실 거면서 어떻게 그림은 놓고 사셨데...?!”

툴툴거리지만 해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확인하니 세현으로선 뿌듯했다.

뭐하는 지도 모를 남자들이 득시글대는 카와모토의 작업실에서 떠나, 무려 지금 해인을 가르치고 있는 건 세현에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 

든든했다.

해인 역시도 이 전과 달리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작업실 내의 두 사람의 열정이 세현에게도 전달이 되어 온 것인지,

늘 개인적인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었던 자신의 장편소설의 퇴고작업은 이제 정말 마무리에 이르러 있었다.

벌써 3년 여.
글을 쓰기로 다짐한 후,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서적들을 참고하며 틀을 잡아 써 들어가기 시작한 이 작업이었다. 

중간 중간에 다른 작업을 병행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의 집필은 항상 세현의 메인작업이었다.

늘 보여 달라고 찡찡대던 해인에게 이제는 자랑스럽게 공개할 수 있는 정도로 다듬어진 작업. 

이제 정말 공개만 앞두어 시기만 조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폭풍 같았던 점심 타임을 혼자 감당해내고 그나마 한가한 시간대를 맞은 레스토랑에서 세현은 다시 사무실 통로를 지나 작업이 한창인 화실로 진입했다.

"저기요...!! 화백님들...?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뭐야? 점심 손님들 다 갔니?"

"예... 덕분에 아주 매우 힘들었습니다...암튼, 하고 싶은 말이 그건 아니고요..."

"응?"

뜸을 들이는 듯한 세현의 반응에 옆에서 그림에 몰두하던 해인도 고개를 돌려 세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귀를 기울였다.

"해인이 너도 와서 봐야 되는 거야, 이리 와봐...!"

"응? 나도? 무슨 일인데??"

세현은 아저씨와 해인을 한 장소로 불러놓고, 가져온 두개의 봉투 안에서 묵직한 원고를 꺼냈다.

"어떻게 보시는 게 좋을지 몰라서 일단 프린트도 해봤어요. 제 소설...드디어 완성했습니다...!!! 어제 끝났어요! 두 분께는 제일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

아저씨와 해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책상에 올려놓은 묵직한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 이제 다 쓴 거야?! 그렇게 오래 걸렸던...!!"

"해인이는 그렇다 치고... 나, 봐도 되는거야?"

"그럼요!!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보여드려야죠...!"

당연히도,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세현의 장편소설 첫 번째 독자는 아저씨와 해인이었다.

미술을 다시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하는데, 구체적인 미션이 생기기라도 하면 더더욱 불이 타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글의 앞부분을 훑어보며 흥분과 동시에 겁을 잔뜩 먹은 듯한 해인의 표정에 비해 여유가 넘치며 살짝 미소까지 띄우고 있는 아저씨의 표정.

"와...근데 당연한 거긴 한데 진짜 양 많다...!! 
이걸 언제 보고..."

해인에게 있어선 처음인 장편 소설의 삽화 작업.

양이며, 스타일이며...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글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해인에게 이야기 했다.

"너무 서두르려고 하지 마...! 해인아, 일단 글 전체 이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

근심어린 표정으로 눈동자를 돌리고 있는 해인에게 세현도 거들었다.

"그래, 괜히 겁나는 거지...! 금방 익숙해 질 거야...!"

"음... 이거 지난 번 단편 몇 컷 때보다 엄청 부담되네..."

보이기에도 엄청난 양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만 해인.

"어쨌든 수고 많았어, 세현아...! 이게 그럼... 네 아버지를 이을 전설이 되는 건가...!!?"

"에이...무슨 말씀을...!! 아무튼 제일 먼저 공개 해 드렸습니다. 천천히라도 꼭 봐주세요...!!"

원고를 남겨두고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급하게 레스토랑 홀로 나간 세현.

작업실의 남은 두 사람은 말없이 세현이 넘겨준 소설을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아직까지도 긴장 가득한 얼굴을 한 해인을 보며 가볍게 말을 걸었다.

"세번은 읽어야 돼, 적어도...!"

"예?! 세번이요!?? 이걸 세번이나...?!"
 
북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경험을 살려 조언을 해주려는 아저씨. 

해인은 읽던 글을 내려놓은 채, 아저씨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래, '적어도' 세번...! 내 방법이긴 하지만...
자, 일단 첫번째는 그냥 일반 독자들처럼 쭉 한번 보는 거야, 장면 그림 생각 말고..."

"그림 생각하지 말고요?"

"그래, 너무 목적만 따라가면 전체 내용에 집중이 안되거든, 일단 전체적인 구조와 톤을 파악하는 게 중요해!"

해인은 이쪽저쪽 메모 용지를 찾다가 화판의 남는 공간에 그리던 연필로 아저씨의 조언을 메모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글 구조가 파악이 됐다 싶으면 다음은 부분적인 이미지를 살짝 떠올리면서 다시 봐, 한번 봤던 거라 속도는 더 빨라지지...!"

"부분적인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씩 읽어가면서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거지...!!"

"아, 아...!"

"삽화가는 어디까지나 원래 글의 이해를 돕는 정도의 역할이어야지, 너무 자기 톤으로 들어가 빠져버리면 곤란해! 그러니까 원작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단 거지! 

그러고 보면, 지난 번 공모전에 냈던 소설의 네 삽화는 정말 괜찮았어...!”

빠르게 적느라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아저씨의 조언을 빠짐없이 옮겨 적는 해인.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터도 그랬지만, 가까운 레스토랑 사장에 불과했던 아저씨는 이미 해인에겐 누구보다도 존경스러운 스승이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하며 해인의 그림도구를 천천히 정리하는 아저씨.

"오늘부터, 세현이 소설 첫 번째로 다 읽을 때까지 이 작업실 문 닫아 놓는다!!"

"예?! 왜요?!"

"직접 글과 관련된 그림이 아니더라도,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보면 미리부터 자꾸 쓸데없는 이미지만 떠오를 거야...!"

"에...! 그... 그래도 폐쇄까지는..."

아저씨는 머뭇거리는 해인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조금 이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해인아!"

"예! 사장님!"

"세현이 소설 삽화 같이 해주기로 한 거 맞는 거지? 저 녀석 그래서 완성하자마자 너한테 보여준 거고? 그럼 내가 관련해서 숙제를 내야겠다...!"

"숙제요??"

아저씨는 화구 정리를 마치고 세현이 놓고 간 소설을 한장 한장 넘겨가며 해인에게 말했다.

"아까 말했던 데로, 세 번까지 본 후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같이 얘기해 보자."

"아...!! 예, 도와주시는 거예요?"

 "아니, 이건 네 작업인데 내가 직접적으로 도와주기는 그렇고, 그저 작업 전에 서로 떠오르는 이미지나 한번 비교해 보자는 거지...!”

"예...예...!!! 감사합니다.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곳저곳의 그림들을 감상하며 남다른 눈을 지녔던 해인. 

막상 시작한 그림은 생각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에 와 작업을 시작한 후 카와모토에게, 안톤에게 같이 작업하던 다른 화가들에게까지 조언은 자주 들을 수 있었지만, 

이렇게 자신의 일처럼 신경쓰며 디테일한 부분까지 챙겨줄 수 있는 스승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곳에 오길 잘했다...’


아저씨는 실제로 자신의 중도 포기했던 예술열정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 듯, 해인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으려는 기세였다.

오래도록 그림에서 손을 놓아 굳어버린 자신의 손을 해인에게 투영하려는 듯.

아저씨는 본인이 말한대로 해인과 함께 작업실에서 나와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며

처음 열쇠를 꺼냈었던 서랍에 키를 다시 넣고는 해인에게 말했다.

“자, 키는 여기에 늘 있어. 내가 말했던 과제 다 끝나서 회의하자는 건 여기 사무실 안에서 하도록 하자. 그리곤 작업에 들어가기.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해인은 레스토랑으로 나와 다시 업무에 투입하고, 아저씨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안경을 끼고는 본격적으로 세현의 소설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진 바짝 붙어 그림 같이 그리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위치로 돌아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청소를 하던 세현은 혼자 중얼거렸다. 

“참, 환상의 콤비다, 환상의 콤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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