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0화 _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지옥...이겠지? ]
"그... 네가 직접 알아봐 줬다던 한기태 라는 사람 관련해서... 얘기해 줄 게 있어서..."
"그래? 나도 세현이가 어떻게 할지 좀 궁금하긴 했었는데...! 안 그래도 여기서 지금 그 얘기 하던 중이었어..."
해인은 아영에게 뭔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지, 전화 멀리로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
"음... 나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만 일본에 좀 다녀올게."
"뭐? 이 판국에 너네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뭐야...? 호, 혹시 상황 좀 어려워졌다고... 지금..."
"그럴 것 같았으면!!! 내가 이렇게 너희들한테 알리기나 했을까!! 정말로 잠깐 볼일만 보고 온다고!"
"...그, 그런..."
해인 몰래 계속 유지하고 있던 그림 판매 사이트에서, 콕 집어 카와모토 그림만의 구매 의사를 밝힌 어떤 고객.
그 예비 구매자가 같은 일본인이라 밝힌 것이 무엇보다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러 작품을 구매하겠노라 선금까지 입금해 준 그 고객에게 직접 그림을 전달하려 카와모토는 직접 일본행을 결심했다.
사이트를 통한 고객이 처음으로 나타났단 사실은 여전히 작업실 동료들에게 전달하지 않은 상태. 다른 화가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흔적 없이 몰래 진행하려는 목적 또한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동료 화가들로서는 해인도 나가고 줄어든 인원에 충당해야 할 관리비, 매번 맞추어야 할 그림 수 등, 갤러리와의 계약 이행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작업실 핵심인 카와모토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 때문에 돌아간다는 거야? 이제까지 한 번도 일본 귀국한 적 없었잖아...!"
"너희들은...! 유럽인이니까 국경만 넘으면 너희 나라지...! 난 상황이 다르잖아!! 몇 년 만에 겨우 한번 멀리 있는 내 나라 들르겠다는데, 이것저것 이유 다 설명해야 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필 이런 시점에...”
개인적인 볼 일 때문에 자기 나라 돌아갔다 오겠다는데 별다른 트집을 잡을 수는 없던 화가들, 차마 본인들이 의심하고 있는 부분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려웠는지, 서로 쭈뼛대며 말을 아낄 뿐이었다.
다들 망설이는 틈에서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한 안톤이 물었다.
“그...럼 언제 정도 올수 있는데? 도중에 갤러리에서 연락이라도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네가 없으면 또 복잡해지는데..."
“걱정 마. 내가 다른 얘기 안 나오게 가기 전에 갤러리 들러 얘기 해놓고 갈 테니까...! 그리고 바로 올 거야. 볼일만 처리하고 오면 되는 거니까.”
사이트로부터 구매 희망 소식을 접한 날부터, 한 점 한 점, 자신의 작품을 집으로 옮겨두었던 카와모토.
한꺼번에 그림을 옮겨대거나 하는 수상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었기에, 이곳의 화가들이 설마 카와모토가 지금 그림 판매 관련한 일로 일본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 일주일 안 걸릴 테니, 다들 그림 전시 기한 맞출 수 있게 작업이나 열심히 하고 있어...!”
카와모토는 그대로 작업실에서 나와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갤러리에 방문했다.
갤러리 내부에는 한 두 명의 손님들이 곳곳에서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카와모토와 친분이 있는 갤러리 직원은 한창 손님들에게 설명을 해주다 뒤늦게 카와모토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 카와모토...! 아직 새 그림 전시일도 안됐는데 웬일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카와모토를 맞이하는 모양새가, 작업실 인원이 줄게 된 것이나 판매를 겸한 다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것 등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음... 뭐 다른 건 아니고...우리 작업실 관련해서 부탁할 게 있어서... 우리 작업실, 인원이 한 명 줄어서 그러는데, 이번 전시 작품 일정 맞출 수 있게 기한 좀 연장해줄 수 있겠어...?"
카와모토와 뒷거래를 해오기도 했던 갤러리 직원은 갑작스레 당당한 태도로 제안을 해오는 카와모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한 번도 이런 식의 공격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요구해 온 적이 없던 카와모토 이거늘.
"뭐? 너희들 쓰는 작업실 인원이 줄은 건 줄은 거고... 그게 우리 갤러리 전시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작품 수 모자라다고 또 뭐라고 할 거 같아 미리 얘기해 두는 거야!"
잠깐의 틈도 없이 또박또박 답변을 내리 쳐대는 카와모토.
갤러리 직원은 평소와 다르게 강경하게 나오는 카와모토에 당황했지만 카와모토는 개의치 않고 당당히 계속해서 의견을 밀어붙였다.
"처음 계약했던 금액에서, 임대료 몇 번이나 올릴 때도 우리가 뭐라 한 적이 있기나 했어?! 어쩔 수 없이 멤버가 줄었는데, 우리한테 대책 마련 할 시간이라도 좀 줘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어이, 카와모토,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임대료를 계속 올렸다니까 마치 우리가 악덕 건물주처럼 들리는데, 아닌 말로 그 때마다 다른 화가들보다도 카와모토 네 그림에 더 인센티브를 매겨 준 것도 사실이잖아...!!"
처음 이곳에서의 정착을 도와주었던 만큼 그림 전시 수익금에 대해서도 카와모토와 모종의 거래가 있던 것은 사실 이지만, 이제까지도 다소 부당하다고 생각되던 갤러리의 요구에도 늘 맞추어 주던 작업실 화가들.
거기에는 무려 예술의 고장. 이곳, 아를에서 외국인들이 머물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 감사의 의미가 컸다.
그렇게 꿈을 펼치려 이곳에서 자리를 잡은 지 2년여.
그 동안 그림 실력 역시도 월등히 성장했던 것인지, 비록 다른 루트이긴 해도, 고가의 금액을 부르며 자신의 그림 구매를 희망하는 자도 나타난 상황이었다.
‘이제 굳이 이쪽에만 굽실 거릴 이유 없잖아?’
갤러리 측의 그간의 무리했던 요구에 대해 언젠가 한번은 지적 해야겠다 생각하던 차.
분명 앞으로도 거래가 계속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이 일본인 고객이 뒤에 있다면, 이런 기회에 갤러리를 상대로 당당하게 이야기 해 볼 수 있지 않을 까...
카와모토는 전에 없던 강한 자세로 갤러리 직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임대료를 줄여달라거나 하는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너네 사정이니까 우리하곤 상관없다’ 얘기하지 말고, 좀 기다려 달란 말야! 멤버 문제 좀 해결 될 때 까지...!”
"음.. 임대료 납입일 연장에, 이번 조정해 달라는 건가? 음...그렇다면, 일단... 사정 그렇다니 이번은 그렇게 해..."
분명하게 수상한 낌새를 감지하면서도 갤러리 직원은 일단 강하게 나오는 카와모토 앞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래, 고마워...! 이제 우리 같이 일 한 지 벌써 2년째인데, 서로 좀 이해해 줄 건 이해해주면서 가자...! 오늘 내일 보고 안볼 사이 아니잖아?"
"그래...뭐 그러고 보니 꽤 오래 되긴 했네..."
단호하게, 딱 얘기하고자 했던 볼일만을 끝마치고 돌아서 갤러리를 나선 카와모토.
카와모토의 등 뒤에는 더욱더 선명해진 의심의 눈초리로 갤러리 직원의 눈빛이 번득였다.
"저 자식...저거 분명 뭔가 있는데...? 무슨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것처럼 행동하는 거 보니...한번 철저히 뒤를 파봐야겠어..."
"흥, 네 놈들이 언제까지 갑질을 할 수 있는 지 두고 보자...!"
역시 뒤에서 불만 섞인 혼잣말을 툴툴대는 카와모토. 그렇지만 이내 희망이 깃든 표정을 얼굴에 머금고는 바로 일본행을 서둘렀다.
***
'아... 직장인들은 이러고 맨날 회사 다니는 거야..?'
하필이면 아침부터 지옥철이라 불리는 노선 속 목적지로 향하던 기태.
밀리고, 발을 밟히고, 가방에 걸려대고...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필이면 열차 중간에 끼어있는 기태를 계속해서 건드려 대는 통에 불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좋은 기분으로 향하는 목적지도 아니건만...
그렇지만, 그 불쾌함 역시, 가까워 갈수록 떨려오는 가슴 한 켠의 중압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번 역은 XX, XX입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역 밖으로 겨우 나온 기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인지, 앞으로 향하는 속도가 점점 더뎌가는 기태를 제치고 바쁜 직장인들은 하나 둘 앞으로 나아갔다.
당연한 일상을 맞이하는 직장인들과는 정반대 상황의 기태.
심지어 역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소위 접근성이 좋다고 말하는 목적지의 위치조차도 불만이었다.
향하는 발걸음을 점점 늦추고 있는 데도 점점 가까워오고야 만 목적지.
모든 것의 시작은 이곳에서 부터였다.
기태는 찾아온 곳은 바로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
결국 자신을 협박하던 정체불명의 여자가 제시한 두 가지 제안 중에서 택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겁이 나서,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만 했다.
단지, 치고받고 싸운 것이나 다름없는 세현과의 전화 후 마음에 쌓이기 시작한 짐을 덜어내고 싶을 뿐이라고...
그저, 답답함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기에 자발적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라 믿고 싶었다.
출판사의 앞까지 다다른 기태는 건물 밖에서 한참동안 눈치를 살폈다.
'어쩌지... 소...소현이한테 연락을 해야 되나... 아... 아냐...자기를 그렇게 시달리게 했던 게 어떻게 보면 내 탓...인데... 어떻게 말 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직원들의 출근 시간, 들어오는 때에 맞추어 다다른 이 곳.
규모가 있는 출판사였던 만큼 출근 시간에는 어마어마한 인파의 움직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많은 무리들 중에서 혹시나 소현을 마주칠 새랴 기태는 일단 몸을 숨겼다.
회사에 들어가며 마주친 사원들은 사원증으로 보이는 목걸이를 두르고 전혀 생기 없어 보이는 아침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인파가 하나 둘씩 출판사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기태는 순간, 스쳐 지나가듯 눈에 들어온 소현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당연히 기태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 자신을 알아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혹여나 하는 마음에 거리 구조물 뒤쪽으로 몸을 더 숨기는 기태.
한창 세현의 문제로 출판사가 홍역을 치룰 즈음 TV 인터뷰에서 본 이래 처음이었다.
출근 중 직장인의 아침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간 고생 많았다는 반증인지, 소현은 헬쓱하니, 힘이 다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정신적, 신체적으로 스트레스를 준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기태는 정작 소현을 눈앞에서 보고나니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새삼 두려움이 앞섰다.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출판사와 수상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라는 것을 다시 매스컴에 퍼뜨리기 위해서는 다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하지만 그전에 일단 이곳에서의 해명이 먼저 일 텐데...
'어떻게 말하지...? 그냥 지나가듯 한 말에 기자들이 반응한 거라고...할까...'
가만히 숨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어 있다 보니 어느덧 폭풍 같았던 출근 시간은 넘긴 듯,
출판사 건물 앞은 더 없는 고요를 맞이했다. 심지어는 지나다니는 차들마저 수가 확 줄은 느낌이었다.
분명히 이제 건물 안에서는 본격적인 근무가 시작됐을 터, 기태는 어느 타이밍에 들어갈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출판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놈이 제 발로 찾아와 자백이라니...’
이 후의 상황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그저 출판사의 선처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만, 그나마 정체 모를 협박범에게 제안 받은 두 가지 중 다른 쪽을 선택해버린다면, 그대로 한기태의 작가 인생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를 일.
집을 나온 지는 이제 두 시간여.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겨 무작정 이곳을 찾은 기태는 가장 중요한 남은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다들 나올 때 한번 들어가서 얘기해 볼까...아냐, 밥 먹고 배부르고 그럴 때면... 사람 말을 더 진지하게 못 들어줄 지도 몰라...'
순간.
기태는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피해가 덜 가게, 좋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지만을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출판사 앞에서도, 여전히 자신만 생각하는 모습.
동시에 세현과의 전화에서 열심히 자신을 대변해대던 모습까지도 같이 떠올려졌다
[ 너 내 친구 맞냐?! 이 나쁜 새끼야?! ]
'그러고 보면... 세현이는 내 친구...가 맞을까'
임형우씨에게 다가가기 위해 용기 내어 세현에게 말을 걸었던 순간부터, 세현은 그저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다.
늘 아버지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공격받는 세현의 옆에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었지만, 그 의도 역시 순수하지만은 않았기에.
표현이 거친 남자끼리라, 뭔가 서로 감정을 확연히 드러낼 만한 인사치례를 한 적은 없었지만,
아마도 세현은 기태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을 법 하다. 그것도 가장 친한 부류라고...
‘나한테... 배신을 당한 기분...이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입구 쪽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서 있던 곳으로 물러나고, 그 곳에서 한참을 서성대다 또다시 입구로 다가가고...
대체 몇 차례나 그 행동을 반복했을까.
같은 장소에서 오랫동안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는 이 낯선 남자를 수상하게 여긴 탓인지, 누군가가 뒤에서 기태를 불러 세웠다.
"여봐요, 당신...!"
"예...!? 예, 예...?!! 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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