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교수님.
낼모레가 크리스마스였어. 토이저러스 셀프 포장대에서 선물을 포장하던 중이었지. 요즘은 포장을 안 해 주는구나, 귀찮은데... 하다가 매장의 크기와 직원의 수가 줄어든 걸 보니 금방 수긍이 되더라고. 삼십 분 전에 아내는 유치원 보낼 선물만 챙기고 정작 우리가 아이에게 줄 선물은 잊었다며, 아이 생일 이후로 모든 걸 놓아 버렸다며, 어쩌면 좋으냐며 울었어. 가로로 길게 그어진 눈에 두 줄기 눈물이 평행하고 일정하게 흐르고 있었지.
어떡해 ㅠ ㅠ
내가 준비할게ㅎ 1
몸이 좋지 않아 반차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십 분 안에, 두어 달 전 아이가 갖고 싶다고 한 보드게임을 정확히 기억해서 구매하고 포장까지 하는 자신이 왠지 기특했어. 심지어 포장을 잘하지 뭐야. 선물 포장에 재능이 있다는 걸 마흔이 되어서야 발견한 거야. 그때 그 전화가 왔지.
그 '본론'을 너무 잘 알 것 같았지만. 형식적인 인사를 지루하게 끌지 않은 점, 빠르고 간명하게 본론을 꺼낸 점, 친절하고 세련되게 거절을 말하는 점은 마음에 들었어. 교수님 콘텐츠 때문이 아니라 그쪽(고객사) 팀장 선에서 문서 작성 과정 자체를 아예 들어내기로 결정이 되었다, 저희(에이전트)도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아 당혹스럽다, 죄송하다, 고 했어. 강사의 콘텐츠는 괜찮았지만, 고객사는 원래 그런 데니까, 에이전트는 고객사가 해달라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는 거고...... 결론적으로 아무도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과를 받았지. 그래서 오히려 등이 간질간질했지.
본론은 길지 않았어. 그 후가 오히려 길었지. 불편한 이야기를 한 뒤라 에이전트 직원도 나도 말이 많아졌어. 둘 다 서둘러 끊고 싶은 줄 너무 잘 알겠는데 말은 점점 길어졌어. 젊은 강사가 너무 귀한데 교수님과 연이 닿아서 저희도 정말 행운인 것 같다, 제가 영광이다 무슨 말씀을, 다음에 꼭 다시 모시고 싶다, 꼭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 매니저님께서 더 당황하셨을 텐데 잘 말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 이렇게 의미 없는 말, 형식적인 말, 본론과 '머언' 말들이 오가다 나도 모르게 그만,
제가 문서 작성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아요.
창피했어. 매니저가 웃었어. 그 웃음소리만큼은 정말 '진심' 같았어. 그래서 더 창피했어. 전화를 끊고 포장을 마저 했어. 한쪽 면을 접어 테이프를 붙이려는데 잘 안 되는 거야. 거기만 붙이면 끝이었거든. 어려울 게 전혀 없었거든. 별거 아니었거든. 자신 있었거든...... 잘하면 울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밖으로 나왔는데 하늘이 누래. 언젠가 마트에서 산 누룽지를 끓였더니 저렇게 누랬었어. 구수한 맛도 전혀 없었고, 조금 끓이니 딱딱하고 오래 끓이니 흐물거려서 전혀 먹고 싶지가 않았어. 그 생각을 하다 아, 내가 아팠었구나. 그때부터 맹렬히 아프기 시작했어. 그런데 오히려 정신은 또렷해지더라고. 내가 지금 당장 무얼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겠더라고. 콘셉트부터 다시 잡을 것, 콘텐츠를 매력적으로 만들 것, 프로필과 포트폴리오를 리뉴얼할 것!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이 있더라고. 밥을 안치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지.
어쨌든, 크리스마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