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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르시 Mar 22. 2024

입사제의에 대한 거절을 처음 했다. 내 나이 40세

워킹맘, 경력단절 최악의 조건 가운데 거절을 했다.

고3 수능을 마치고서 부터

서빙알바, 콜센터 알바 등등 계속 했다.


집은 교통비를 대줄 형편도 등록금을 대줄 형편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력서를 넣어서 연락이 오면 무조건 면접을 봤고

다니라고 하면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다녔다.


돈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세대 원주 캠퍼스로 편입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생활비가 필요했다.

등록금은 대출이 되었다. 기숙사비도 대략 생활비 대출로 막을 수 있었지만

밥을 먹는 생활비나 전공서적을 사는 비용은 막을 수 없었다.


밥을 먹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삼각김밥으로 입학초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학관 이사님께서 배식알바를 하라고 해주셨고 일주일에 2시간만 배식하면

방학까지 급식을 모두 공짜로 주셨다. 엄청난 배려였고 장학금과 같은 것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몇몇 친구들이 같이 배식 알바를 했으나 금방 포기를 하였다.

부끄러웠다고 한다. 식당 아줌마처럼 아이들앞에서 일해야 하고 장화신고 앞치마 두른 자기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캡모자를 푹눌러쓰고 배식을 몇달하다 포기하였다.


나는 아는 사람만나면 맛있는것 더 배식해주고 신났고..

나를 먹여 살려준 고마운 배식이기에 부끄러움은 나에게 없었다.


돈이 필요해서 한정식 근처 고깃집 알바를 시작했고 학교 근처다보니

학생들이 데이트하러 찾아왔는데 학교 선배였다. 그때는 조금 부끄러웠다.

저 친구들은 생활비 벌지 않아도 되고.. 이런 비싼집에서 데이트도 할 수 있구나 부러웠다.


 


편입한 상태에서 수업만 따라가도 버겁지만..

생활비를 벌어야해서.. 학관식당알바, 근처 식당알바, 근로학생알바 3군데를 계속 뛰면서 수업을 따라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또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부해도

뒤에서 2등을 했다. 그때 한 동기에게 그런말을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어떻게 뒤에서 2등이냐며..

그 사람은 꼴등이었다. 차라리 자기처럼 꼴등이 나은것 같다고 얘기했다.



편입후 꼴등만 하니

그리고 공부할 시간도 넉넉하지 않으니 겨우 졸업했고

돈이 없다보니..이력서도 아무데나 넣기 시작했고

바로 연락오는곳 면접보고 오라고 하면 무조건 다녔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무데나 면접을 보고 다니다 보니..

항상 사수가 없었다. 맨땅에 헤딩해야 되는 곳을 다녔어야 했고 결국 그 경력들은 물 경력이 되었다.


이력서를 넣으면서 내 마인드는 그랬다.

난 영어도 못해. 나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야. 나는 학점도 안좋아. 나는 할줄아는게 잘 없어. 전공도 못살렸어.

나의 꼬리표를 스스로 엄청 달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 젊었고 난 노력해서 편입했고. 힘들었지만 끝까지 마무리하는 사람이였고. 

나는 생활력이 강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생각을 못했고..

매순간 이직할때마다 나는 나에게 나쁜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원주캠퍼스야. 영어못해.

애가 생길 수 있는 기혼자야.

10년 경력 물경력이야.

나는 애딸린 워킹맘이야

나는 9시~6시퇴근 못해 짧게 일해야해.등 악조건을 항상 나는 달고 살았고..

회사도 그래서 낮은데만 지원하고 최저시급만 줘도 괜찮다며 입사하고 다녔다.



그래 지금 어쩌면 가장 안좋은 조건이야

9시30분~5시까지 밖에 일 못하는 그리고 워킹맘. 그리고 손 많이 가는 7세.


그런데 내가 40중후반이 되었을때..

지금 시기를 돌아보면.. 나 또 후회할것 같아..

그래 40초반 그래도 젊었다며 그때라도 시도했을것을... 할것 같아.


그래서 이제 회사에 숙여서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마음을 먹고 입사제의에 거절을 했다.


환경이 열악했다.

사무실에 화장실 냄새가 나고-하수구 차단하면 된다

사장님이 육아를 배려해준다고는 하지만-연차는 없다.

일을 잘하지만 육아로 자주 빠지는 직원에 말은 못하고 너무 스트레스 받으셨다고 한다- 말을하는게 차라리 나은듯하다. 

내 업무 자리 뒷편에 나를 비추는건 아니라고 하지만 cctv가 있다.

일을 시작하면서 자리 잡으면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도입해도 괜찮을지 여쭤보았지만 싫다고 하셨다.

같이 발전하고 싶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몇군데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회사는 분명 있고 아직 40초반이라도 충분히 기회가 있어 보였다.


내가 원했던 회사에서 나를 부르진 않았지만.. 면접은 볼 기회가 있었고

거기에 떨어지면서 충격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글 쓸 기회도 생기게 된것 같다.




연세대 원주 캠패스 나의 친구들은 현재

의대로 편입하여 의대와 레지던트등 우수한 성적으로 의사를 계속 하는 친구들도 많고

하버드 다음의 학교에 들어가 석박을 마치고 우리나에와서 교수로 활동하는 친구

그리고 존스홉킨스대에서 의학쪽 연구를 지속하는 친구

그리고 석박이 들어갈 수 있는 연구실을 학부 졸업으로 삼성연구원에 들어갔던 선배들이 많았다.


운이 좋게도 난 그 친구들과 매우 친한 관계거나 나를 많이 챙겨준 친구들이어서 그 친구들 곁에서 

그들의 마인드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친구와 기도실에 있다가

피아노 치고 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부럽다'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옆에 친구는 


"피아노 잘 치고 싶어? 그럼 연습하면 가능해. 네가 피아노 시간 투자안해서 그래. 너는 더 책을 읽고 친구관계에 더 투자했기에 넌 그걸 더 잘하는거야."


이 친구는 연세대 원주 졸업후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이 사건을 얘기하면 자기는 여전히 그 마음 동일하다고 얘기한다.


교수가 된 친구들도.

자기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던 아이들이고

교수님들이 그들의 곁에서 계속 그 메세지를 주셨었다.

그리고 결국 자기가 나온 대학 학부보다 더 좋은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나는 나에게 꼬리표를 붙였다.

"나는 원주캠퍼스야. 나는 영어못해" 그러면서 나는 그렇게 맞춰서 살아갔다.


하지만 성공한 친구들은

"나는 가능성이 있어. 원주가 어때서? 여기 어렵게 공부해서 온거야. 난 여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왔어"라고 외친 친구들은 정말 그 시간들을 가치있게 보냈다.


나의 생각은 너무나 중요하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자존감 낮은 생각들 다 벗어버리고 던져버리고 울며 흘려버리고 다시 일어나자.


나의 딸이 나와 같은 마인드로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변화해야 한다.


...

어제 가고 싶던 회사에 불합격 통지를 받고

너무나 우울했던 나에게 쓰는 편지.


더이상 우울해하지 말고.. 너의 악조건만을 생각하지 말고..

너가 가지고 있는 건강. 생각.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 

그거로 다시 알어나자. 너는 할 수 있어.

너를 찾는 회사가 있을꺼야. 


불합격 통보로 멘붕이 오고 집 대출비와 생활비에 걱정되어 우울하고 아이에게 짜증을 냈지만..

그걸 반성하고 다시 일어나려는 너는 분명 다시 일어날꺼고.


다시 일어나서 나처럼 부정적인 꼬리표를 달고 사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될거야.


잘하고 있어.

잘했어.

거절도 잘했어.

이제 시작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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