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고요함을 마주하는 일.
가로등이 거의 없는 이키섬에서는 저녁 8시만 되도 사방이 컴컴해진다. 대낮에도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보기 힘들고 호텔 같은 큰 숙박시설도 거의 없다 보니 초저녁이 지나면 섬 전체가 고요해진다. 나는 여행지에서 일기를 평소보다 훨씬 주절주절 쓰는 편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섬에 머물렀던 4일 동안 저녁을 먹고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온천장에서 목욕까지 마치면 방에 틀어박혀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어슬렁 거렸는데도 10시만 되면 잠이 쏟아졌다. 시골 사람들이 부지런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가 보다. 늦은 밤까지 깨어있게 하는 불필요한 불빛도, 혹은 소음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작년에 오키나와에 갔을 때는 자마미섬에서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혼자 감동하여 울컥했던 기억이 났다. 이키섬에서도 매일매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어째서인지 별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도시의 편리함과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소박한 시골에서도 별을 보기가 힘들다니. 별이 안 보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서울에서는 별을 보겠다고 밤하늘을 올려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었다. 소중한 것들은 계속해서 잃어 가면서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만 좇으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 조금 서글픈 밤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자고 느지막이라고 해봤자 8시쯤 일어나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오하요우' 아침 인사를 받으며 일본식 조식을 받아먹었다. 가자미나 연어 같은 종류의 생선구이, 낫또, 연두부, 일본식 김과 절임 야채, 그리고 매일 빠지지 않았던 미소된장국. 고기보다 생선이 좋은 나에게는 언제나 반가운 밥상이었고, 특히 미소된장국이 정말 맛있었다. 조개와 미역을 넣고 끓인 시원한 국물을 그릇째 들고 후루룩후루룩 마시고 나면 한여름에도 그 따뜻함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침을 먹고 숙소 근처에 마트에 잠시 들렀는데, 서로서로 아침인사를 건네며 그날 먹을 것들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다웠다. 대형마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쓸어 담듯 장을 보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살가운 풍경이다. 평일 아침에 부부가 함께 장을 보러 오거나, 작은 차를 몰고 하나같이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마트를 찾은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고 점심이나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런 일상적인 모습이 이키섬과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단조롭지만 결코 쉽지 않을 일상들.
한 시간에 한 대 뿐인 버스를 놓쳐서 해수욕장에 갈 방법을 찾던 내가 관광안내소 직원과 짧은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구세주처럼 나타난 아저씨가 자기가 해변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이번 여행은 운이 좋은 게 틀림없어'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며 뻔뻔하게 차를 얻어탔다. 일본어를 못한다고 했는데도 계속해서 말을 거신다.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던 걸까? 어쨌든 또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이키섬에서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히토리?" "혼자 왔어? 한 명이야? 여자 혼자 그것도 4박이나 머무른다고 하니 모두들 놀라고 신기한 눈치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물어보면 "와따시와 칸코쿠! 히토리 데스!" "한국사람이에요! 혼자 왔어요!"를 자랑하듯 얘기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
한여름에, 그토록 얌전한 바다를 본 적이 있던가. 이키섬에서 가장 유명한 츠츠키하마 해수욕장은 사람이 없기도 없었지만, 파도도 세지 않아 더없이 조용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 빛 바다와 바다 빛 하늘이 한 몸처럼 섞이기도 하고,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넘실대는 파도는 어린 아들과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물놀이를 함께 해주는 어떤 일본인 아빠처럼 참 성실하구나 싶기도 했다.
한여름의 바다가 나를 그토록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이틀을 그곳에 찾아가 살이 새카맣게 타는지도 모르고 모래 위에 누워 뒹굴뒹굴하다 맘이 내키면 한 번씩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했다. 요새 열심히 배워뒀던 수영 실력을 보여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한가지 아쉬움이었다. 아무렴 어때, 사람이 듬성듬성 보이는 넓은 바다에 혼자 떠서 수영을 하다 하늘을 향해 누워 둥둥 떠다니는 기분은 생각보다 더 황홀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곳에서도 역시나 혼자 왔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으니 서로가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참 미련하게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살이 빨갛게 될 때까지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생각해보니 이토록 조용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좋은 이유는 평소에 내가 다른 사람을 그만큼이나 신경 쓰며 살아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더라.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내 스스로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소모하며 살아왔던지. 그런 감정들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음이 사실이다. 혼자인 바다에서 내가 보고 싶은 곳에 시선을 두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을 살피면서 머물렀던 그 시간들을 통해, 이제는 조금이라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돌아가서도 이곳에서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동안 스스로 알고는 있지만 애써 외면해왔던 자신의 못난 모습을 순순히 인정하게 되기도 하고, 이따금 예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기도 한가보다. 햇빛에 익어 새빨개진 어깨와 다리를 보며 나는 나의 부주의함을 한번 더 확인하기도 했고, 그래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의미 없는 감정에 괴로워하지 않으며 내 원래의 의도대로 여행을 잘 해나가고 있는 내 모습에 기쁘기도 했다.
세상에 이키섬보다 좋은 여행지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이곳이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이곳을 다녀온 것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일이라는 걸 스스로 좀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이렇게 내 얘기만 하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