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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Aug 02. 2017

왜 여전히 송강호냐 묻는다면

20여 년 꾸준한 걸음… 그가 관객의 사랑을 받아 온 이유

꾸준한 걸음이다. 배우 송강호는 무려 20여 년 간 성실히 스크린 작업에 몰두했다. 단역으로 출연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을 영화 데뷔작으로 삼아 '초록물고기'(1997)와 '넘버3'(1997) 등 1990년대 굵직한 작품들을 통해 존재감을 떨쳤다. 연극 무대에서 탄탄히 쌓은 내공은 영화 활동 초기부터 이미 그를 주목해야 할 배우의 반열에 올려놨다. 


각 영화의 작업 시점을 기준으로, 작품 간 그의 공백은 길어야 햇수로 2년이었다. '조용한 가족'(1998)과 '쉬리'(1998)가 한 해에 제작됐고 '반칙왕'(2000)과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2)과 'YMCA 야구단'(2002)은 각각 같은 해에 개봉했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 봉 감독과 재회한 '괴물'(2006), 칸 수상작 '밀양'(2007) 등 여전히 한국영화계 유의미한 족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수작들이 이후 송강호의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사진=각 영화 공식 포스터]


지난 10년 간의 활약은 더욱 빼곡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 2008), '박쥐'(2009), '의형제'(2010)까지 매년 새로운 작품에 뛰어들었다. '푸른 소금'(2011)과 '하울링'(2012)이 비교적 저조한 흥행 결과를 내놓은 직후, 그는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2013)와 사극 '관상'(2013)을 같은 해 선보이며 다시 건재한 티켓파워를 과시했다. 천만 영화 '변호인'(2013)에 이어 '사도'(2014)와 '밀정'(2016)까지, 그의 연기 여정은 읊기만 해도 이토록 숨이 가쁘다. 


그가 그려낸 인물들은 대개 불완전하다. '초록물고기'의 판수나 '넘버3'의 조필, '조용한 가족'의 영민처럼 가볍게 건들대는 캐릭터들을 떠올릴 때 쉽게 수긍할 것이다. '괴물'의 강두, '밀양'의 종찬처럼 어딘지 어리숙한 구석이 있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극한의 상황에서 윤리적 딜레마를 마주하는 '박쥐'의 상현이나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이 취하는, 결코 간단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도 송강호의 몸을 필터로 삼는 순간 그 영화적 결정을 향한 관객의 호의를 얻어내고 만다. 관객이 '반칙왕'의 대호와 '밀정'의 정출이라는 전혀 다른 두 인물에게 나란히 연민을 느끼게 되는 바탕에도 송강호라는 대전제가 놓여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효자동 이발사', '관상'과 '변호인'에서 맡은 캐릭터들은 보다 친근하다. 인물의 중심에 인간애와 부성애, 정의와 같은 보편적 메시지가 깃든 경우다. 이념보다 인간을 위에 둔 군인, 아들의 누명을 씻어내려는 아버지, 곤경에 처한 관상가, 부조리를 마주한 변호사까지, 비교적 일차원적으로 설명되는 인물들의 얼굴을 송강호는 여러 겹의 표정으로 그려낸다. 셀 수 없는 붓질로 덧칠된 유화처럼, 그의 연기의 저변엔 압축된 입체성이 있다.


[사진=쇼박스]


새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 제작 더 램프)에서도 송강호는 자신의 미덕을 기꺼이 활용한다. 1980년 5월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서울의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 분)이 통금시간 전까지 광주에 다녀오면 큰돈을 준다는 말에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 분)를 태우고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로 가게 된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운전대를 잡고 당대 히트곡인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신명 나게 흥얼거리는 만섭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목청 높여 클라이막스를 불러대는 그의 모습은 만섭의 앞에 머지않아 쏟아질 참상과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사글세가 밀린 어려운 형편 속에 딸과 단둘이 살아가는 만섭은 '서울 광주 왕복 10만 원'이라는 달콤한 제안을 낚아채 신나게 광주로 향하고, 그곳에서 무고한 시민들의 비극을 마주한다. 


신념이나 정의보다 생활이 중요했던 송강호의 인물들을 우리는 몇 명 더 알고 있다. '변호인'의 송우석도, '밀정'의 이정출도, 크고 작은 실익 앞에 타협했거나 때로 무지했다. 만섭의 정서가 출발하는 지점은 특히 '변호인'의 우석과 닮아있다. 하지만 배우는 부지런한 덧칠을 멈추지 않는다. 송강호는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밑그림을 새로운 작품으로 기어코 완성해낸다. 


관객은 혼자 있을 딸을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광주를 떠나던 만섭이 어떤 얼굴로 운전대를 잡는지 기억할 것이다. '단발머리'를 불러 젖히던 만섭의 표정과 '제3한강교'를 부르는 그의 눈이 어떻게 다른지, 딸의 신발을 고르는 설렘과 목멘 부채감이 어떤 방식으로 한 얼굴에 공존할 수 있는지를 결코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왜 아직도 송강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택시운전사'는 관객을 위한 개정판 해설서로 손색이 없다. 이 부지런한 배우의 섬세한 손끝이 또 어떤 그림을 그려냈을지, 그 답을 기다리는 기쁨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권혜림, 조이뉴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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