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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Sep 19. 2016

'단편 히치하이킹',
목적지는 아무도 몰라

과감하고, 강렬하고, 새로운 이야기… 단편 영화의 매력 속으로



태초에 단편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물씬 피어오르는 감독들이 있다. 종종 이 세기 한국영화의 진보를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 이들의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라. 그리고 필모그래피가 나열된 페이지를 하나, 둘 넘겨보자. 난생처음 듣는 제목의, 종종 의외의 배우가 출연한, 러닝타임이 20분 내외인, 낯선 영화들이 당신을 반길 것이다.


신인 시절, 혹은 중견 감독이 된 뒤에도 중간중간 짬을 내 연출했을 이들의 단편 영화들은 오늘날 한국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파격을 담고 있다. 100억 원 대 상업 영화에서도 쉽게 만나기 힘든 짜릿한 감흥들을 소품 단편의 짤막한 러닝타임에서 발견해내는 기쁨을, 이미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특히 이름난 감독들의 신인 시절 단편들은 그들의 영화 인생을 맛 보이는 예고편 같은 역할을 했다. 다분히 사후적 분석이지만, 이 논법의 생명력은 지금도 유효하다. 김지운에겐 '사랑의 힘'(1998)과 '커밍아웃'(2000)이, 봉준호에겐 '지리멸렬'(1994)이, 박찬욱에겐 '심판'(1999)이, 나홍진에겐 '완벽한 도미요리'(2005)가 있었다. 걸출한 액션 감독 류승완의 등장을 알린 장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역시 그의 초창기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였다.


단편을 통해 출중한 신예 감독들을 점찍는 일은 미래지향적이자 희망적인 재미다. 부산이나 전주, 부천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들의 단편 섹션은 물론이고 미쟝센, 아시아나 등 매년 열리는 단편영화제에도 미래의 실력파 감독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영리 목적의 극장 상영이 제작의 주목적이 아니다 보니, 큰 자본이 투입되는 장편 상업 영화와 달리 감독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점도 단편의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이런 발견의 즐거움은 공히 배우들에게도 적용된다. 독립영화계에서 연기력을 쌓고 상업 장편영화들을 통해 더 많은 관객과 만나고 있는 수많은 연기자들의 필모그래피에도, 단편은 있다. 충무로 스타로 발돋움한 변요한은 수십 편의 단편 영화에 출연한 이력으로 그 성실함과 열정을 인정받았다. 독립영화계를 누비다 지금은 보다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엄태구, 류혜영, 이민지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스타가 된 배우들의 앞선 활약상, 혹은 가파른 성장을 관찰하기에 단편 영화는 더없이 좋은 수단이다.


단편은 짧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무엇보다 경제적이다. 30분 안쪽의 러닝타임으로 한 감독의, 배우의 연소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인터넷, IPTV, 모바일 등 콘텐츠 수용 플랫폼이 다양해진 만큼 단편 영화에 대한 접근성도 높아졌다. 단편영화제뿐 아니라 감독 혹은 배우의 이름을 걸고 이들의 단편작들을 엮어 상영하는 특별전 프로그램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단편 히치하이킹'은 최근 5년 내 발표됐던 한국의 수작 단편영화들을 소개하는 글이다. 우연적 이동 수단인 히치하이킹을 통해 낯선 곳을 여행하듯, 가볍고 별 것 아닌 연결 고리를 지닌 단편 영화들을 이어 소개한다. 당신을 마음을 뺏어간 그 감독의 또 다른 작품, 연기로 가슴을 내려앉게 만든 그 배우의 전작, 꿀 같은 '케미'를 보여줬던 두 배우의 또 다른 협업물 등, 단편영화들 간 연결 고리는 무수하고 무수하다.


대개의 히치하이킹에 목적지가 있다면, 이 여행엔 딱히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저 잘 알려지지 않은 한 편의 짧은 영화가 주는 의외의 감흥, 유망한 감독과 배우들의 미래를 점치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이 여행의 유일한 동력이 될 것이다. 동행은 언제나 환영이다.



(삽입 사진=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달이 기울면'(감독 정소영), '숲'(감독 엄태화), '세이프'(감독 문병곤), '타이레놀'(감독 홍기원), '콩나물'(감독 윤가은),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감독 정승오)의 공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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