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 / 파울로코엘료 / 문학동네 / 2018
어쩌면 이전의 나는 히피의 삶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은 아니라는 뜻,, 이번에 중미를 여행하면서도 히피를 많이 만났는데, 아티틀란 호수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던 미국사람 댄 이랑은 꽤나 오래 대화를 나눴었다. LA에서 왔다는데, 남미에서 약 10년을 떠돌면서 낮에는 히피들이 많이 파는 물건들을(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만들어서 팔고, 밤에는 클럽에서 디제잉을 한다고 했다. 하루에 한 개도 못 팔 때가 많다고. 그래도 미국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행복하단다. 댄은 그 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대부분 아는듯했다. 하루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에게도 말을 걸면서 시간을 유영하는 사람이었다.
여튼 이 책은 재밌다. 파울로 코엘료의 이야기는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항상 다 읽으면서도) 맘에 들지 않아했었는데, 이번 책은 그냥 너무 재밌어서 이틀만에 다 읽었다. 지하철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 젊은 청년이었던 파울로 코엘료가 보이기도 했고, 네덜란드 서점에서 카를라를 찾는 대목에서는 비포선셋이 떠올랐다.
답은 매우 간단했다. 거대한 공포가 생각을 마비시킨 것이다. 두뇌가 사고를 완전히 멈추고 더는 공포도 두려움도 없이 그저 상황에 순응하는 기이한 복종 상태가 된 것이다. 감정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일종의 림보*가 채우고, 과학자들이 아직도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 의사들은 이 완전한 감정의 결여, 혹은 그들이 Flat Affect**라고 일컫는 이 현상에 대해 면밀하게 검사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스트레스성 일시적 조현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쩌면 과거의 망령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방법은 그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보는 것이리라.
* 라틴어로 변방, 경계라는 뜻.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곳
** 무감정
일 년 반 전의 공포를 되짚어본 후 그는 많이 차분해졌다. 모든 일을 두려움 없이 맞서고, 그저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사실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듯.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 아스트랄체: 신비주의에서 일컫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몸 중 하나. 물질로서의 인체를 둘러싼 영적 육체
(...) 상대의 사소한 배신들을 눈치채더라도 눈감아줄 동반자를 만들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함게 가정을 꾸리고, 종국엔 자식들이 삶의 유일한 이유라고 선언하며 자식들의 끼니와 자식들의 미래와 학업과 직장 등 그들 인생 전반에 대해 함께 걱정할 누군가를 찾는 일 말이다. (...) 이 년 전, 카를라는 이 절대 자유 속에서 사는 것이 더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을 믿는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늘 방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타인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배신을 당하더라고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다.
"세월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 빌마. 아직 건강하고 용감한 지금 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어. (...) 우리 둘 다 암스테르담이 미치도록 따분하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그건 우리가 이곳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야. 오늘 저 브라질 남자를 만나고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면서, 미치도록 따분한 건 이 도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어. 내가 이곳에 익숙해져서 자유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어."
"하지만 헤로인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 다만 천국에 올라갔다가 이 거지 같은 세상에 다시 떨어진 듯한 기분이랄까. 그러고 나서 직장에 가면 불현듯 모든 게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고, 자기 권위와 권세를 드러내느라 매 순간 다른 이들의 인생에 훼방을 놓지. 그러니 그 모든 위선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천국은 비싸고, 입구는 좁아. 그곳에 들어간 이는 인생이 아름답고, 태양은 정말 여러 갈래의 광선으로 갈라진다는 걸 알게 되지. 더 이상 우리가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는 단색의 동그란 원이 아닌 거야. 다음날에도, 일을 마치고 멍한 눈을 한 사람들, 여기 있는 이들보다 더 멍한 사람들로 가득 찬 열차에 몸을 싣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현실을 잊으려고 하지. 이런 젠장, 현실은 이 하얀 가루인데 말이야. 텔레비전이 아니라!"
이틀 뒤면 그도 관광객들도 풍차가 어디에 쓰였는지 기억도 못 할 터였다. 그런 것 따위나 머릿속에 담자고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조금씩 다른 이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했는데,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으레 그러하듯, 이들처럼 좋은 의도로 만난 소규모의 무리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일에 대해 뭐라고 해명할 필요 없어.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한 사람이 있는 법이야."
우린 가만히 머물러 있는 걸 혐오하는 세상에 속해 있고, 그것이 우리가 순례의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그녀는 실의에 빠진 순간에 용기 있는 척하는 방법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것들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정말로 순환하는 공간을 돌고 있었다. 기쁨을 거두고 고통을 되돌려주었다가, 다시 고통을 거두고 기쁨을 되돌려주면서.
스스로가 권력자, 그러므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으며 그의 인생의 하루를 망치려 하는 자들 때문에 그는 겁먹지 않을 터였다.
팸플릿에는 사람들 여럿이 알록달록한 버스 앞에서 손으로 평화의 사인, 처칠의 승리 표시 이자 히피들의 상징인 브이 자를 그리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달라지기를 바랐지만 정작 자신을 바꿀 순 없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여정 자체이기 때문이오. 난 에어프랑스 일등석에서나 마주칠 만한 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거든요. (...) 이전의 삶, 다시 말해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는 동안 난 내가 알아야 할 사람들을 전부 만났습니다. 터놓고 말해 그들 모두 서로의 복사판이었소. 똑같은 경쟁심, 똑같은 관심사, 똑같은 과시욕... 내 부친과 함께 아미앵 근처 들에서 일하던 나의 유년 시절과는 딴판인 세계였소."
"어쨌든 히피 운동에 점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몇몇 기자들은 히피 사상이 그리스 철학의 키니코스학파(Cynicos) 사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했어요. (...) 키니코스학파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디오게네스죠. 디오게네스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하도록 교육받았고, 따라서 본연의 가치로 되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지우는 짐을 완전히 잊어야 하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새로이 시작되는 매일의 삶에 기뻐하고, 권력, 이욕, 탐욕 등 이제껏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입되었던 모든 걸 포기하는 거예요. 키니코스학파들에게 존재의 유일무이한 목적이란 불필요한 것에서 해방되어 매 순간, 매 호흡에서 기쁨을 찾는 거였어요. 디오게네스가 평생을 집이 아닌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한 얘기잖아요."
무형의 힘은 어디든 스며들며, 연금술사들이 아니마 문디*라 부르는 걸 품고 있으니까.
*라틴어로 세계의 영혼이라는 뜻
비로소 그녀는 그 약이 왜 금지되었는지 이해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그 약에 접근할 수 있다면, 세상은 정상적인 작동을 멈추리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심연하고만 접촉하려 들 것이었다. 타인의 행운이나 불행에 무심한 채 마음의 동굴에 들어가 오로지 명상에만 잠기는 수도승들이 수십억 생겨나는 셈이었다.
널 죽는 날까지 사랑할 거야. 네팔에 도착해서도 널 사랑할 거고, 마침내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도 계속해서 널 사랑할 거야. 물론 지금과는 다른 사랑이겠지만. 신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일 존재한다면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해. 다시는 내가 혼자인 데에 만족스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부탁하고 싶어.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마음과 고통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왜냐하면 고통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는 어둡고 음침한 방 같은 마음을 느끼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