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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ya Apr 13. 2020

[#하루한줄] 그 알량한 권력과 무지

미스 함무라비/문유석/문학동네/2016

출장 중 읽었던 책. 재미있기도 하고, 어려운 내용들을 쉽게 잘 써주셔서 술술 읽혔던 기억이 난다. 어쩜 우리 사회는 이렇게도 끊임없이 각계각층에서 보내는 경고를 무시했을까. 그 많고 많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또 똑같은, 아니 상상하기도 힘든 사건들이 터지는 요즘. 도대체 어디까지가 인간의 바닥일까 싶은 순간들. 그 알량한 권력으로 자기보다 한 칸이라도 밑에 있는 존재들을 억압하여 본인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불쌍하고 추악한 인간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왠지 수컷 공작새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있잖아요 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호화찬란한 꼬리를 활짝 펴고 암컷에게 어필하려고 애쓰는 공작새들. 무늬는 다양하더라고요. 인맥 자랑, 미국에서 박사 한 자랑, 집안 자랑, 몸에 걸친 명품 자랑...


결국 성욕보다 권력의 문제 아닐까. 주로 자기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약자에게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하잖아. 자기보다 한 칸이라도 밑에 있는 존재들에게 손을 대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거라고. 갑질과 통하는 얘기지. (...) 알바 시절에 느낀 건데, 그렇게 공부 많이 한 분들이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지하더라고요. 수컷의 짝짓기 본능이라면 최소한 상대를 유혹할 가능성이 있는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상대에게 오히려 혐오감만 일으키는 방법으로 그 본능을 표출하니 놀라울 뿐이죠. 


전통적으로 판사의 삶이란 기록을 보는 삶이다. 판사가 보는 기록은 타인들의 삶, 그중에서도 갈등, 분노, 의심의 장면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객관적인 제삼자가 아니라 갈등의 당사자 각자가 자기 시각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잊힐 권리. "Right to be forgotten"


인간의 기억이란 참 묘해서 완결된 것은 곧 망각하고, 미완의 것은 오래오래 기억한다. 


박 판사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 박 판사님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어서 누구보다 더 좋은 판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남의 상처를 누구보다 더 예민하게 느낄 줄 아니까요.


경제학자 토비 모스코비츠와 존 베르트하임은 야구, 축구 등 스포츠의 홈 어드밴티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통계적으로 어드밴티지가 존재함을 밝혀냈는데, 그 원인은 응원 때문에 선수들이 더 열심히 뛰어서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아니라 심판들이 열광적인 응원에 반응하여 자기도 모르게 홈팀에 유리한 판정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판사 및 검사 들로 구성된 가석방위원회의 결정을 조사한 결과 점심식사 전에 비해 포만감을 느끼는 식후에는 석방률이 현격히 높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인간은 숨기고 싶은 부분에 대해 직설적인 질문을 받으면 단순 명쾌한 부정 대신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등 간접적인 변명으로 자기 방어부터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없는 경우에는 대체로 망설이지 않고 명쾌하게 부인한다. 


우리 사회는 술 먹은 사람들의 응석에 너무나도 관대해요. 좋은 사람인데 술 때문에 실수했다, 사회가 팍팍하니 술에라도 의지해서 견디는 거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술 먹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아니잖아요. 거의 대부분 남성, 그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그러죠. 알량하지만 남자라는 권력, 나이 먹었다는 권력을 면허증 삼아 술을 핑계로 세 살 먹은 애처럼 떼쓰고 행패 부리는 거라고요. 그런 미성숙한 저지레를 왜 사회가 오냐오냐 받아줘야 하는 거죠?


법대생 시절, 처음 형법총론을 읽으며 가장 매료된 부분은 범죄와 형벌의 본질에 관한 구파(고전학파)와 신파(근대 학파) 형법 이론의 대립이었다. 구파는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존재로 보는 계몽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 다시 말하면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에 위반한 자이기 때문에 형사책임을 지우는 것이고(도의적 책임론),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그 비도덕적 선택에 대한 응보(응보형주의)다. (...) 구파의 관점에 의하면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판단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형사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 다만 취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를 것을 충분히 예상 할 수 있었는데도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 후 결국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원인에 있어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조각에라도 '자유의지'가 있어야 책임을 지운다. 자유에는 정말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발달로 사회 문제가 심화되고 범죄가 증가하자 신파 형법 이론이 등장했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인간을 보다 실증적으로 바라보려는 입장이다. 인간의 자유의사는 환상에 불과하고(결정론) 범죄는 행위자의 소질과 환경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므로 범죄자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하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하다고 본다. 범죄자의 사회적 위험성 때문에 형사책임을 지우는 것이고(사회적 책임론) 형벌은 범죄로부터 사회를 방위하기 위한 수단이다(목적형주의). 따라서 정신질환자나 형사미성년자 같은 책임 무능력자라 하더라도 사회적 위험성이 있다면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보안처분을 해야 하고 실제 저지른 범죄가 아직 무겁지 않더라도 장래 큰 범죄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으면 중형에 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형사재판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 법이나 재판이란 건,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안온한 중산층의 도덕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들에겐 술 먹고 싸우는 게 일상이다. 사람은 절박한 처지에 놓이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늘 자존감이 낮은 상태, 그런 환경에선 폭력 사건이 자꾸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회구조적 모순 만을 기계적으로 되뇌며 범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주폭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지만 이들에게 피해 입는 사람도 똑같은 약자다.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사건이다. 당하는 사람들은 젊은 여성이나 할머니, 영세 상인 들이다. 같은 환경, 같은 입장이라고 하여 모두가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결국 범죄를 저지른 개인도,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방치하는 사회도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판사로 일하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밑바닥, 어둠을 많이 보게 된다. 처음엔 분노하고 우울해하거나 냉소적으로 되는데, 계속 보다 보면 그 사람들이 이상하고 나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상황이 나쁜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쁘거나 추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나쁘거나 추한 상황이 있는 거다. 그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판사들에게도 올 수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국민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면 늘 옳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진짜로? 유대인은 열등한 인종이니 살처분해야 한다는 것은 독일 국민 다수의 뜻이었고, 흑인은 백인과 같은 버스를 타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라는 나라 국민 다수의 뜻이었지. 여자아이를 강제로 할례 하고 민간인을 납치해서 참수하고 고대 유적을 파괴하는 행위들도 진심으로 옳은 일이라 믿으며 열광하는 사람들의 지지 위에서 벌이지지. 난 말이야, 소수의 악마들이 선량한 국민들을 총칼로 위협해서 인류의 어리석은 악행들이 벌어졌다는 식의 이야기는 모두 사기라고 생각해. 실은 선량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동참했었다고. 


부장님, 저 이래 봬도 '미스 함무라비'라고 불리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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