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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형 Oct 26. 2020

사직서와 이력서 사이

틈입하는 편집자, 열다섯 번째 편지

수현, 


헤아려보니 출판사에서 일한 지 십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십사 년간 세 곳의 출판사에서 일했습니다만, 컴퓨터 하드 속에 감추어 놓았던 사직서를 꺼내어 슬쩍 날짜를 적어보거나 이력서에 그간의 세월을 보완해놓는 일은 훨씬 잦았습니다. 사직서와 이력서를 새삼 확인해보는 일요일과 월요일 사이의 시간들은 유난히 빠르게 흘렀습니다. 거취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을 다독여 그들의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곤 했지만 정작 제 자신은 쉬이 흔들리고 무너지곤 했습니다. 


노동자로서의 자괴감을 토로하는 후배들에게 저는 그들에게 쉬이 동조하기보다는 정색하며 말하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편집자는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자영업자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나의 기획으로 자본가의 투자를 이끌어내야 하며, 내가 만들어내는 책의 채산성으로 그 가치를 입증해내야 한다고, 고정비에 대한 정확한 책임감을 가지고 변동비를 효율적으로 관리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 수 없고 만들어내야 하는 책을 만들지 못하는 편집자의 자괴감은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저는 한 선배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신을 믿을수록 불가지론자가 되어가고 있으며, 책을 만들수록 책 만드는 일의 가능성을 회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을 믿으나 신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리고, 책을 믿으나 책에 이르는 길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출판사에서 일한 세월은 출판산업 불황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출판의 데이터는 그것을 입증해내고도 남습니다. 독서율과 가구당 도서구입비는 해마다 뚜렷하게 감소합니다. 발행부수는 늘어나고 있지만 종당 판매부수는 현저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출판시장 규모는 정체되어 있지만 해마다 출판사가 증가한 까닭은, 이른바 1인출판사를 비롯한 소규모 출판사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십 대 이상의 편집자가 건재한 출판사를 쉬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신입사원을 뽑는 출판사는 거의 없고 다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경력자만 뽑습니다. 북에디터 사이트의 구인게시판은 우리 출판계가 당면한 현실을 닮았습니다. 난삽한 중상과 게으른 모략이 넘쳐나지만 대안이 없습니다. 대안이 없기에 저 사이트마저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처럼 사십 대 편집자가 되면 늘 이번이 마지막 출판사라고 생각하며 이직하게 됩니다. 또는 창업을 고민합니다. 제게 편집자의 길을 보여주었던 선배들도 그러했습니다. 어떤 이는 더 늦기 전에 출판사를 시작하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그래도 월급 받는 편집자가 낫다고 만류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저의 현실을 되돌아봅니다. 제가 만들 수 있는 책의 가능성에서부터 아이들의 성장 속도, 대출 이자와 상환 시점, 고정지출 내역들 따위까지. 그러다보면 슬그머니 꺼냈던 사직서를 다시 본래의 자리로 가져다놓게 됩니다.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 일하는 노동자가 어디 편집자뿐이겠습니까. 요즘 저희 편집부가 기획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도시 노동자로 일하다가 시골에 가서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들의 아이템으로 승부를 보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도시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다가 시골에 가서 작은 식물원을 직접 만들어 자신이 키워낸 식물들을 내다 팝니다. 어떤 이는 시골 장터 한 모퉁이의 십 평 남짓 공간에서 빵을 만들어 팝니다. 어떤 이는 바닷가에서 서핑 교습소와 펍을 만들어 살아갑니다. 


자칫 이들 사례는 위험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성공은 낭만적으로 보이고 멋지지만, 이들처럼만 하면 시골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라는 얄팍한 미끼를 던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들처럼 똑같이 해도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크니까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베스트셀러 사례 분석을 하고 그 성공 요인을 답습한다고 하여 그처럼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반대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들이 서점에서 책을 발견하는 시대는 지났고, 책의 발견과 독자와의 연결은 여러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으나, 저는 베스트셀러의 성공 요인 중 상당 부분은 대체로 자본권력의 힘과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앞서 언급한 ‘시골에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 치킨집 하나 없는 섬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들은 섬에서 삼 년 정도 살면서 그곳에 정착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집을 구하여 고치고 서점 건물을 직접 지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월 백 만원의 수입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시간을 벌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시와 시골에서의 삶의 정확한 손익계산서를 가늠해보았습니다. 치킨은 시켜 먹을 수 없지만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바닷가를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의 가치는 생존과 모험의 기반 위에서 보존되고 발현됩니다.  



서점 사진을 탐색하다가 그들이 큐레이팅한 책 중에 제가 만든 책을 발견했습니다. 저 책을 만들던, 그러나 지금은 잊힌 마음들이 생각났습니다. 먹먹해졌습니다. 저 책의 마음은 저를 떠나 세상을 떠돌다 누군가를 만나 그의 무모한 용기를 한껏 추동합니다. 책 만든 사람은 게을렀으나 다행히도 책의 마음은 성실했습니다. 그들 서점의 이름은 ‘밤수지맨드라미’입니다. 바닷속에 사는 밤송이산호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바다생물이지요. 저는 그들이 밤수지맨드라미처럼 아름답기를, 그리고 모쪼록 살아내기를 빌었습니다.


다시 사직서와 이력서를 꺼내어봅니다. 1월 14일에서 15일로,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건너가는 시간, 창밖에는 미세먼지가 자욱합니다. 저의 살아온 이력을, 그 시간들을, 제가 만들었던 숱한 책의 목록들을, 잊힌 그 책의 마음들을 또박또박 떠올립니다. 회의가 확신을 압도했다고, 그래서 좌절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어쩌면 제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고한 확신이 숱한 회의를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책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지요. 우리는 좀더 자주 사직서와 이력서를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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