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입하는 편집자, 네 번째 편지
수현,
오늘은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십이 년 전, 첫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저는 두려웠습니다. 아버지란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아버지가 되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열일곱의 어느 여름날, 교회 수련회의 전도자가 달큼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떠올려보라고 속삭일 때에야 비로서 저에게는 아버지란 존재가 애당초 없었다는 걸 깨달았듯이, 저는 첫아이의 첫울음을 끌어안는 그 순간 제게 들이닥친 아버지의 숙명을 두려워했습니다.
제 나이 여섯 살의 이른 봄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게 아버지는 존재가 아니라 풍경으로 유래해왔습니다. 그날의 하늘은, 지붕은, 골목은, 나무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온통 무채색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투병하던 그즈음, 집에는 친척들의 잦은 방문으로 소란했고 어머니는 종종 소리 내어 울고 있는 누나를 달래다가 다그치곤 했습니다. 하루 두 번 아침저녁으로 아버지 곁으로 불려 들어가 탁하게 갈라진, 낡고 굵은 가래 끓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만나던 그 시간이 어서 지나기를 바랐습니다.
집 앞 골목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비명처럼 들렸습니다. 뭔지 모를 해방감에 잠시 기뻐했던 것도 같습니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불려가 아버지의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구나, 삼촌들도 우리 집을 떠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날부터 고난의 시간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온종일 어머니 곁에 다가갈 수 없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안장하던 오후 영정사진을 가슴에 안고 언덕을 힘겹게 오르던 두 살 터울의 형은 훌쩍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저를 품어주던 어머니도, 함께 뛰놀던 친구 같던 형도 잃어버린 것 같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형으로부터 단절된 채 철없는 아이로 영영 남겨질 것만 같았습니다. 훗날 지독한 가난을 지날 때마다, 거친 노동에 지친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밤새 들을 때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제가 버릇없이 기뻐했기 때문에 우리 집이 벌을 받는 거라고 자책했습니다. 해마다 명절과 기일에 맞춰 비포장도로를 두어 시간 달려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지독한 멀미에 시달렸습니다.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마다 그 막막한 슬픔을 추상해야 했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차를 타면 언제나 서둘러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저희 집은 점점 가난해졌지요. 부자 동네에서 가난한 동네로,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아파트에서 반지하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중학교 시절의 담임선생은 분기 공과금을 못 낸 아이들의 이름을 교실 게시판에 붙여놓고 청소를 시켰습니다. 처음엔 열댓 명의 아이들로 시작했다가 다음 분기 고지서가 나올 즈음엔 서너 명으로 줄어들었지요. 방과 후 청소는 일 년 내내 저의 몫이었지만,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어머니 곁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아서, 결코 그 부당함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유품 중에는 세계문학전집이 있었습니다. 오십 권에 불과했지만 학교 도서관도 동네 도서관도 없던 어린 시절, 저의 ‘바벨의 도서관’이었습니다. 지금의 세계문학전집과는 질과 양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고 모자랐지만, 당시 나에겐 지난한 현실을 견뎌내는 거의 유일한 일탈의 공간이었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살림을 줄여야 했지만, 저는 기어코 세계문학전집만은 사수해냈습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의 방랑을 모사하였고, 《톰 소요의 모험》을 읽으며 정의로운 사람은 오직 모험하는 사람이라는 가설을 수립하고, 《정글북》을 통해 맹렬한 존재들이 추종하는 권력의 정신을 탐구하였으며, 《동물농장》의 혁명의 실패를 반추하며 혁명가의 길을 궁리하였습니다. 《마담 보봐리》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사이에서 저의 남성을 발견하고, 《햄릿》과 《맥베드》 사이에서 치유 불가능한 인생의 슬픔을 탐구하다가, 《파우스트》에 이르러 가까스로 구원에 이르렀지요. 《적과 흑》을 연애의 전범으로 삼다가 청춘의 위기에 처했고, 《제인 에어》의 곡절을 위로로 삼아, 다시 《데미안》으로 돌아올 즈음에 전 싱클레어가 아니라 어느새 데미안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 있었으니, 언제나 서사 다음의 서사는 저의 몫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 상처받는 자존심은 위로를 받거나 혹은 그것을 잊게 했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현실을 딛고 미래를 꿈꾸는 판타지가 되었습니다. 마음껏 일탈하던 어린 시절 저의 골방은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이광주,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 한길아트, 2001)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꿈꿨는데, 저의 책들은 어느 무엇으로의 존재가 아니라 오직 나로서 존재하는 그 무엇의 성취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현실이 닫아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저의 책들은 무수한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세계문학전집은 1976년판이었습니다. 막내가 세 살이 되었을 무렵, 세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위해 세계문학전집을 서재에 들였을 것이라고, 이제야 저는 추정해냅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에야 그 마음을 짐작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너를 지켜줄 거야, 이 책들이야말로 언제나 너의 편이란다, 기도하듯 당부하는 그 마음을.
저는 책 만드는 일에 심각한 회의가 들 때마다 그 마음을 떠올립니다. 특히 요즘 그러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책들이, 또 다른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