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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l 03. 2022

하스미 시게히코와 가라타니 고진

사사키 아쓰시의 [현대 일본 사상] 3장 요약

하스미 시게히코는 플로베르를 전공했다. 플로베르는 일물일어설로 유명하다. 각 대상에는 정확히 꼭 들어맞는 어휘가 딱 하나씩 존재한다는 생각. 지금으로선 굉장히 촌스러운 발상이지만,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은 오랫동안 작가들의 철칙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재밌는 건 하스미 시게히코는 플로베르와 정반대되는 생각이었다는 거.


보통 “작품을 잘 읽는다”는 뜻은 그 작품의 주제나 작가의 메시지를 잘 파악했다는 뜻일 테다. 거기엔 모종의 ‘정답’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니 최대한 정답에 가깝게 읽은 독해가 훌륭한 독해라고 인정된다. 하스미는 그러한 생각에 반대했다. 작가조차도 자기 손을 떠난 작품에 관여할 수 없으며, 해석의 몫은 오롯이 각 독자에게 있다고. 그러니 천 명이 나쓰메 소세키를 읽으면 천 명의 나쓰메 소세키가 존재하게 된다.


하스미의 저러한 생각은 본인의 오리지널은 아니고, 기존에 바르트, 들뢰즈, 데리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더 재밌는 건, 정작 하스미의 행보는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하스미의 권위가 매우 높아서 그의 영화평은 해당 영화를 읽는 하나의 범례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 하스미와 생각이 비슷했다. 해석에 정답은 없다는 점에서. 하지만 궁극적으로 가라타니는 하스미와 달랐는데, 하스미의 경우 모든 해석이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본 반면 가라타니는 어떤 해석도 오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특정 행위를 했다고 가정하다. 누군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묻는다면, 그는 열심히 자신의 행위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실제 행위와 그에 대한 설명 사이에는 반드시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그 누구도 자기 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변호할 수 없다.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라 해도 본인 작품의 메시지와 주제, 의미와 가치에 대해 완벽하게 해설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무라카미 류가 멋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이번 신작의 의미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무라카미는 딱 한 마디로 답했다. “그걸 알았다면 그냥 말로 하고 끝냈겠죠.”


그 무엇도 그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는 가라타니의 생각은 괴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불완전성 원리. 화이트헤드와 러셀이 열심히 수학의 존재 근거를 증명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을 때, 같은 시간에 괴델은 수학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증명해 버렸다. 그렇다면 수학의 존재 근거를 수학에서 찾을 수 없다면 어디서 찾아야 할까. 어쩔 수 없다. 수학의 밖에서 찾아야 한다. 수학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내부와 외부라는 도식이 생긴다.


가라타니의 문제 의식은, 왜 항상 존재와 그것에 대한 언어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 그 괴리를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구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라타니의 문제 설정에는 2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부와 외부라는 설정 자체도 가라타니라는 사상가의 발명일 뿐이라고 말해버리면 할말이 없어진다. 애초에 가라타니가 인간의 ‘내면’이라는 것도 근대의 발명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이거다. 괴리를 발생시키고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근본적인 구조를, 종국에 가라타니가 밝혀냈다고 치자. 하지만 그때도 실제 구조와 그것을 논하는 가라타니의 분석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떻게 해도 구조에 접근할 수 없다. 어떤 해석도 모두 오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한동안 가라타니는 방황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아마도 가다머였던 것 같다. 가다머는 한 구조에 저항하는 것은 구조 ‘바깥’이 아니라 다른 구조라고, 하나의 입장은 대화할 수 있는 다른 입장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지적 충격을 받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의 존재 근거를 설명하는 것 또한 그 존재의 외부일 필요가 없다. 한 대상의 존재 근거는 다른 대상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타자’를 발견하게 되고 지적 방황을 극복한다.


그렇다면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교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가라타니의 다음 문제 의식이었고, 그에 대한 고민은 『탐구 1』 『탐구 2』 『트랜스크리틱』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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