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사상 공간]을 읽고
1.
어떤 존재도 완전히 추상적일 수는, 또 완전히 구체적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추상과 구체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존재가 개별성, 특수성을 획득하려면 반드시 그 존재를 관할하는 초월적인 추상이 있어야 한다. 재밌는 건 그 초월적인 추상 또한 완전한 추상일 수는 없고, 어느 정도의 구체성을 띨 수밖에 없다고.
2.
화폐를 위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화폐라는 초월적인 추상이 있기에 세상의 모든 사태와 현상은 상품 또는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구체성과 개별성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화폐가 완전히 추상적이라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지폐라는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되어야만, 즉 화폐 또한 일말의 구체성을 지녀야만 시스템은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의 천황제에도, 나치즘에도, 파시즘에도, 미국 패권주의와 냉전 체제 등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3.
1929년 미국 대공황도 위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을 기점으로 세계 경제의 주도권은 확실히 미국으로 넘어갔다. 유럽의 거대 자본에는 미국의 달러화가 상당히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허나 1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 강대국들은 금본위제를 택했으니 여기서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금은 초월적인 추상이자 동시에 자연에 물질로 존재하기에 금본위제라는 시스템이 작동된다. 그런데 미국 달러화라는 새로운 초월적 추상이 생겨버렸다. 문제는 1920년대 당시 미국 스스로는 자신의 화폐가 세계 시장에서 초월적 추상으로서의 입지에 섰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달러화는 세계 시장에서 구체성을 확실히 얻지 못하게 되었고 그 괴리 때문에 발생한 것이 미국 대공황이라고.
4.
(이 부분은 책에 나오는 내용이 아님)
그렇다면 클래식음악과 현대미술의 각자도생도 위와 같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후기인상주의 이후로 음악계와 미술계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음악계는 더 이상 새로움을 주입받기를 거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게 되고, 시장의 주도권은 작곡가에서 플레이어로 넘어간다. 미술계는 정반대다. 끊임없이 새로움만 추구해 나가고 시장의 주도권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크리에이터에게 몰빵된다. 가령 조영남 사건은, 은연 중에 미술시장이 그래 왔다고 여겨져 오던 것들이, 이제는 확실히 그렇다고 선언된 사태처럼 느껴진다. 플레이어는 개차반이고, 전권은 100% 크리에이터에게 있다.
음악계는 여전히 2~300년 전 귀신님들의 음악을 누가누가 더 테크니컬하게 연주하나, 하는 점이 관건이다. 이걸 미술계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루벤스나 푸생의 그림을 누가누가 더 잘 그리나 하는 거여야 한다. 하지만 미술계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반대로 미술계의 현 상황을 음악에 적용한다면, 더 이상의 플레이어의 가치는 없는 셈이다. AI가 연주해도 그만이라는 식이어야 한다. 대신 누가누가 더 괴상하고 기묘한 멜로디와 리듬, 화성과 음계를 연출할까가 관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음악계 또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음악계와 미술계의 서로 다른 행로가, 각 필드에서 초월적인 추상이 구체성을 획득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 게 아닐까 싶은 거다. 음악의 경우 초월적인 추상으로서의 작품은 구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 그것은 음악의 본질적인 문제다. 연주는 끝나면 증발하기 때문이다. CD? 바이닐? 그것은 연주를 담은 매체/그릇일 뿐이다. 작품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영화 파일을 영화라고 부르지 않듯.
미술작품은 구체성을 확실히 획득하게 된다. 회화는, 오브제는 그 자체로 구체적이다. 그리고 심지어 구매하고 소유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미술은 자체적인 시스템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반면, 음악은 사실상 시스템이 붕괴되어 버린 상태다. 이 양반들은 100년 뒤에도, 200년 뒤에도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드문드문 쇤베르크나 리게티 같은 작곡가가 나오긴 하겠지만. 아카데미로부터 쥐발톱만큼의 관심을 받고(논문 쓸 때 유용할 테니까), 시장에선 무시된 채 지하 30층으로 추락하지 않을까.
5.
(다시 책 내용으로)
냉전 이후 사회주의의 몰락은, ‘자유’를 초월적 추상으로 내세운 시스템의 우세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자유가 현실에서 구체성을 획득할 때마다 제 살을 갉아먹게 된다는 점이다.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나온 게 생태주의다. 근대적 자유란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택과 행동은 없다. 아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피해를 주고 있는 셈이다. 가령 숨 쉬는 동안 우리는 이산화탄소를 내뱉는다. 초월적 추상으로서의 자유가 구체성을 획득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위태로워진다. 이것이 자유주의가 지닌 본질적 모순이다.
책은, 애초에 추상으로서의 자유가 허상인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며 끝난다. 가령, 역사는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혁명에 가담했다고 기술한다. 그것이 로베스피에르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로베스피에르 본인은 그런 인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사후에 도입된 해석적 언명이기에,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혁명에 가담했다”는 건 지금 우리 시점에서나 가능한 문장이지, 1789년에는 불가능한 문장이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사후에 갖다붙이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 우리는 정말 그 행동을 하기로 선택했던 걸까.
저자의 생각을 방증하는 것이 광고 산업이다. 광고는 이 제품을 구입하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소비자들은 그 광고가 개뻥임을 안다. 알면서도 그 제품을 구입하길 선호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 자유라는 것도 광고 같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