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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Sep 02. 2022

문학과 비평의 가능성

가라타니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을 읽고

1.

근대적 사고, 그러니까 이성중심주의와 합리주의의 아버지가 데카르트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오해라 말한다. 데카르트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막판 굳히기 한 건 레비스트로스였다. 그는 사르트르를 비판하기 위해 사르트르의 주체 개념이 데카르트에게서 비롯했다고 주장하며 사르트르와 데카르트를 사고의 절름발이로 비하했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데카르트보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더욱 플랫하고 이성중심주의적이며 서양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 레비스트로스야말로 비서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온 사회가 서구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으니 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 사회 및 부족 사회의 특수성이 인간 사회 전반의 보편성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 사회가 동일한 거대 법칙에 따른다는 그의 사고야말로 더욱 이성중심주의적인 게 아닐까.


데카르트가 말했던 ‘코기토’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레비스트로스가 비판했던) 그런 플랫한 자아가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데카르트의 오리지널이 아니다. 원작자는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똑같이 반복했을 때, 그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가라타니에 의하면, 데카르트가 의심했던 건,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공동체의 관습과 윤리에 따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모두가 실은 공동체 내의 질서에 따라 생각하면서도 개개인은 자신이 주체적이고 고유한 사고를 하고 있는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데카르트가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조국을 떠나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생활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사고방식이,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에 가능했다.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말한 자아란, 그동안 자신의 것이라 여겨온 생각들이 실은 공동체의 관습과 질서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자아다. 그 자아는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 사이에 존재한다.



2.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니체의 초인은 동일한 의미망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 둘 다 공동체에 대한 의심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데카르트는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들을 주관하는 상위 개념으로서의 신을 너무 쉽게 도출해 버렸다는 것이고, 니체는 공동체 외부라는 공간을 상상하고 꿈꿨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자’는 위 두 사람의 결론이 지나치게 공상적인 급발진이라고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제안되었다. 그는 사회성과 역사성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사고가 성립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3.

그러므로 철학의 기원은, 그리고 공동체의 기원은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의 사이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조국에서 추방되어 살았고, 파르메니데스는 외국에서 살았고, 데모크리토스는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공부했다.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와의 조우를 통해 자신의 내부를 테두리 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먼저 있고, 교통이 나중에 있었던 게 아니라, 교통을 함으로써 비로소 공동체끼리의 경계가 획정지어진 것이다. 그 경계에서, 양쪽 공동체가 지닌 생각의 위상적 차이에서 사상이 탄생한다.



4.

하나의 질서가 사회에 자연스러우면서도 공고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질서를 부여하는 대상에게 초월적인 추상성과 현실적인 구체성이 모두 필요하다. 유대교가 보편 종교가 되지 못하고 민족 신화로 머문 이유는, 유대교의 신은 초월적 추상성만 지니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가 보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건 현실적 구체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예수 덕분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라는 초월성을 지녔지만, 동시에 인간의 뱃속에서 태어나 육신을 가진 생명체였다. 그는 신화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자이나교나 힌두교와 달리 불교가 보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5.

가라타니 고진의 맨 처음 문제의식은, 왜 사람들은 삶에 대한 답 없는 고민을 끊임없이 할까, 하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인간과 삶과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에 탐닉하며, 반복적으로 불안해하고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 그는 탐구하고 싶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60년대 말~7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의 쇠퇴이다.


두 번째 이유는 90년대 이후 문학의 죽음이다. 문학이 죽었으니 비평도 죽을 수밖에 없다. 과거에 문학과 비평은, 작품과 사회가 하나로 연결된 것이었다. 사회와 무관한 독립적인 작품이라든가 작품과 동떨어진 사회를 생각할 수 없었다. 문학의 죽음 이후 작품과 사회는 결별하고 둘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그러다 보니 비평은 문학 작품에 대한 내재적인 분석 아니면 사회적 언술을 위해 작품을 수단화하는 인상비평만 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평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 기능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하는 점이 가라타니 고진의 이어지는 고민이었다. 그 고민의 결과 그는 비평의 대상을 문학 작품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대상으로 확장했다. 문학의 죽음은 문학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사회의 문학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은 문학적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관계된 어떤 것이든 비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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