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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Sep 19. 2022

공동체를 넘어 사회로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 요약

1.

서로 다른 체계 사이의 가치 위상의 차이가 잉여가치가 된다는 발상을, 가라타니는 언어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말하다-듣다’ 혹은 ‘쓰다-읽다’의 쌍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은 사실 성립하지 않으니 말이다. 반드시 화자/필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어긋나게 청자/독자는 이해(오해)한다.



2.

순수한 문학이란 없듯, 순수한 자본주의란 없다. 문학이 본래 폴리포닉 하듯, 자본주의 또한 근본적으로 폴리포닉 하다. 자본주의는 공동체(체계)의 차이에서 이윤(잉여가치)을 발생시키며 돌아간다.


그렇다면 맑스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붕괴, 이상적 공산사회의 도래란 모든 공동체(체계)의 차이가 0이 되는 순간, 그러니까 모든 공동체가 완벽하게 포개져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순간일 것이다. 당연히 그 사회에서 화폐는 소멸할 것이고, 정치도 사라진다.



3.

규칙이란 외부든 내부든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면 규칙이 존재할까.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규칙이 성립할까. 규칙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자본주의 또한 그것의 규칙이 선험적으로 있기에 돌아가는 게 아니다.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관계를 통해 점멸하는 규칙이 있기에 자본주의는 성립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존립 가능성이다.



4.

중국이나 유럽 등은 국경을 인위적으로 그어야 했다. 따라서 국경 외부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반면 일본은 국경이 해안선이므로 인위적으로 그어진 게 아니다. 자연히 일본인에겐 외부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


그래서 일본인은 완성된 구성이라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일본인에게 구조주의적 사고는 맞지 않았고, 전근대 때부터 이미 포스트모던적, 해체주의적 사고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그렇다고 일본 근대 이전부터 포스트모던적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도착이며 오리엔탈리즘일 뿐이다) 20세기 후반에 서양이 근대를 극복할 힌트를 일본에서 찾으려던 움직임은 그런 일본의 문화적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물론 개가 똥을 못 끊는다고,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을 못 버린 태도가 더 크다)



5.

후설은 의식을 의식하는 메타적인 의식을 ‘초월론적 자아’라 불렀다. 그는 초월론적 자아가 자기 의식을 생각할 수 있듯, 타인의 의식도 추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후설의 ‘초월론적 자아’를 자아의 변용이라 비판한다. 타인의 의식을 생각하는 메타의식이란 결국 자신의 이입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진정한 타자는 없다.


하이데거는 후설을 비판하며 ‘공동존재’를 내세웠으나, 그 또한 공동체의 확장일 뿐이다. 거기에도 타자는 없다. 레비나스는 그러한 후설과 하이데거를 비판하며 ‘타자’ 개념을 정립했던 것이다.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의 차이화를 깨친 것으로, 거기엔 역시 타자가 없다. 깨달은 자는 오직 자기 문제에만 관심을 가질 뿐 타자의 상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6.

세계종교란 에고이즘의 부정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부정이다.


유대교에서 신과의 계약은 신이 곧 공동체 외부의 존재, 타자임을 의미한다. 신이 공동체 내에 있다면 계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엄마 아빠와 계약하지 않듯) 우상숭배 금지 또한 신이 외부자=타자임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그 신은 인간들에게 공동체 밖으로 나가라고 명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는 말은 종교에 대한 계몽주의적 비판이 아니다. 민중의 고통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비합리성/환상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거라는 제언이다. 그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종교라는 집단신경증에 걸리면 개인신경증이 치료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모세와 일신교』에서 프로이트는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고 추론한다. BC 1350년경 이집트 18대왕 아크나톤은 갑자기 이집트 전통신앙을 폐지하고 일신교 체제로 바꿨다. 태양신 아톤을 섬기는 종교였다. 허나 아크나톤이 죽자 곧바로 일신교는 폐지되고 기존 토속신앙이 부활했다. 프로이트는 모세가 왕족 출신이고 실패한 아크나톤의 뒤를 이은 인물이라 평한다. 일신교로 업그레이드 하려 했던 모세는, 이집트는 이미 글러먹었다 판단하고 대안으로 유대인을 택했다.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신이 말한 가나안땅=사막으로 갔다. 가나안땅이란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사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모든 공동체와 교통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모세가 살해당하며 모세의 신은 추락하고 유대인의 토속신인 여호와가 부활했다. 여기서 오해 말아야 할 것은, 모세에게 말을 건 신은 여호와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호와는 유대 민족의 토속신이다. 시간이 지나 억압된 유년의 기억이 신경증으로 올라오듯, 모세에 대한 기억은 유대교 예언자들에 의해 상기되었다. 그후 유대교는 모세의 신과 여호와가 혼합된 존재로 나타난다. 어떨 땐 모세의 신으로, 어떨 땐 여호와로.


유대교가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던 건 모세의 신 덕분이다. 모세의 신은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모든 공동체의 사이/교통에 위치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모세의 신을 믿는 자들은 공동체를 뛰어넘는 세계라는 공간을 상정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신도 모세의 신과 같은 레벨의 존재였다. 그 신은 공동체를 의심하게 하고 공동체 바깥으로 부르는 내면의 목소리였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 무엇인지조차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7.

‘무제한’은 셀 수 없어 끝을 상상할 수 없지만 외부는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한’은 셀 수 있어 끝을 상상할 수 있지만 외부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지점은, 데카르트가 무한을 생각했음에도 그것을 무제한처럼 다루었다는 점이다. 무한을 가정하면 외부는 불가능하므로 초월적 타자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자신의 옳음을 쉽게 증명하기 위해 무한을 무제한으로 곡해하고 손쉽게 초월적 타자(신)을 내세워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신체와 감정의 이항대립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의 이항대립으로 이해해야 적확하다. 정신이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냐,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연결되냐는 질문은, 사회가 어떻게 공동체에 자체 질서를 부여하는가, 사회와 공동체는 어떻게 교통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전 글을 참조) 저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치철학자들, 가령 홉스, 로크, 루소 등이 공동체와 사회를 혼용하여 그 메커니즘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법 또한 자연법(사회적 레벨)이 선행했고, 실정법(공동체 레벨)이 후행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자연법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실정법으로 보면 나치와 같은 집단은 처단할 수 없다.



8.

생산-소비

상품-화폐

소설-비평

물건-광고


여기서 전자가 본질/실체이고 후자가 파생이라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후자야말로 선행한다는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이겠다. 가치가 선험적이라면 후자는 불필요하다. 가치란 것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오히려 후자가 토대로 있기에 전자의 존재와 가치가 보장받는 것이다.]



9.

가라타니는 들뢰즈로부터 개별성(특수성)과는 전혀 다른 ‘단독성’이라는 개념을 구상했다. 개별성은 공동체의 맞은 편이지만, 단독성은 사회의 맞은 편이다. 단독성을 개별성과 구별해야 한다는 그의 강조는 공동체와 사회가 전혀 다른 레벨임을 역설하기 위함과 등치다.


그렇다면 왜 공동체와 사회를 구별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극복 가능성을 사회 레벨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공동체와 사회를 구별하지 않고 같은 뜻으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대상이 등가교환되는 마법(비약)은 바로 그 착각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대상을 단독성 레벨에서 파악하지 않고 공동체-개별성 레벨로, 유(類)적 레벨로 파악하기 때문에 비등가성이 등가적으로 교환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환을 멈추려면 대상의 단독성을 부활시키는 이 관건이다. 단독성을 인식하려면 사회적 레벨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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