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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19. 2022

만들어진 '내면'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요약

1.

1500년 전후 유럽인들이 북·남미를 발견한 것과 19세기에 일본이 홋카이도를 발견한 것은 동형(同型)이다. 구니키타 돗포는 홋카이도를 마치 순백의 무주공산을 발견한 것처럼 썼다. 하지만 홋카이도에는 이미 오랜 세월 아이누인이 살고 있었고, 일본은 아이누인을 살육하거나 강제 동화시킴으로써 일본에 병합할 수 있었다. 유럽인과 일본인 둘의 관점에는 역사와 타자가 배제되어 있었다.


그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풍경의 발견은 외부를 향한 시선이 아닌, 오히려 내면을 향한 시선에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한 내면에서 근대적 자아가 성립했다.



2.

우리는 문화인류학이 인간의 원시적 근원을 탐구하는 학문이라 여기지만, 사실 문화인류학이야말로 제국주의의 파생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나츠메 소세키가 영문학에 속았다고 느낀 건 그와 같은 전도와 은폐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클래식이라며 고전문학이야말로 인간의 영원한 보편적 가치를 머금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당대 지식인들에게는 개무시당하던 듣보잡이었다. 셰익스피어를 발견한 건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의 발견 후 셰익스피어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부상했다. 그것이 영문학사가 은폐시킨 역사의 은폐이자 전도이다.


자아/주체가 근대의 발명이듯, 오리지널리티 또한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발명한 개념이다. 그전에는 인용 모방 합작 등이 자유로이 행해졌다.



3.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거나 “나는 왜 이곳에 있고 저곳에 없는가?”라는 파스칼의 말에서, 이미 그의 시대에 공간 인식이 근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스칼이 공간에 대해 저와 같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공간 자체를 선험적이고 균질적인 무언가로 여기는 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파스칼 이전의 사람들은 공간을 저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균질적인 공간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파스칼의 인식은 그 자체로 도착(倒錯)이다. 그것은 자기 시대에 새롭게 생긴 발상임에도 마치 그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기는 출구 없는 착각이다.


마찬가지로 실존주의 사상의 ‘실존’ 또한 그와 같은 공간을 가정해야 성립 가능하다. 그럼에도 마치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철학이 근원적이라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를 객관적 사실로 인식하는 토대 또한 균질적인 수학적 공간 위에 있다. 그런데 그러한 초월적 공간에 대한 가정을 근대철학은 간과하며 마치 시원적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후설은 근대 서양철학이 지닌 그러한 전도성에 대해 염려했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린네의 분류표 덕분에 다윈의 진화론이 탄생 가능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더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표 또한 린네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표는 안 되고 린네의 분류표여야 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질적인 토포스를 전제한 반면, 린네는 균질한 장소를 전제했기 때문이다. 린네의 장소는 위에서 말한 근대적 공간이다.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린네로 넘어오며 사라진 공간적 위계를 시간적 위계로 전환한 셈이다. 균질적이고 평평한 생물종의 분포에 시간적 깊이/원근을 부여한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마찬가지로 회화에서 2차원 평면에 3차원 깊이를 준 건 소실점이다. 소실점을 못 보면(잊으면) 시각적 3차원성이 선험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했던 작업이 그러한 소실점을 인지시키고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각 인간 역사, 심리(내면), 신이라는 소실점을 집어내어 빼버렸다. 특히 마르크스는 원인 모순 대립 등은 결과(=끝)에서 뒤돌아봤을 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 지적했다. 그는 인간 역사를 소거하면 인간 사회의 구조적 배치 양상이 잘 보인다고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당대의 심리학이나 최면술 등이 주목한 무의식이란 그들 렌즈에서나 보이는 도착에 불과하며, 인간의 마음은 심리 표층에 나타나는 정보의 연합적·통합적 배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소거하려 했으나 반대로 우리에게 그들은 역사의 새로운 발견자, 무의식의 새로운 발견자로 완전히 오인되어 버렸다.



4.

신경증은 ‘유년기’를 발견한 사회의 산물이다. 심리학이 광인의 발견과 동형(同型)이듯 아동심리학/발달심리학은 아동의 발견과 동형이다. 역사학자들이 현 사회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를 발견했듯, 정신분석학자들은 구조론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년을 발견했다. 그들은 유년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지정하고, 보호되지 못한 유년은 훗날 신경증을 유발한다고 진단했다. 신경증은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이 생산한 병인 셈이다.



5.

중국은 일찍이 근대화하지 못한 반면, 일본은 가능했던 이유를 천황제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황제는 직접 통치하는 통치자였다. 그래서 중국 황제에게는 초월성(관념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반대로 현실성(물질성)이 두드러졌다. 그에 반해 일본 천황은 사회를 직접 통치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상징적 인물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일본 천황은 현실성보다는 초월성에 방점이 찍혔다.

들뢰즈와 아사다 아키라를 잠시 빌려오자면, 근대사회의 질서는 초월적 레벨의 물질적 대상이 존재함으로써 성립 가능하다. 왕의 목을 자르고 그 자리에 자유 평등 우애라는 관념적 가치를 심었듯, 황제라는 실질적 통치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일본은 천황이라는 관념적 존재를 위치시켰다. 그럼으로써 일본은 근대적 가치를 이식해 수월하게 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



정리.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따르면 네이션 형성에 언어의 자국어화는 필수다. 언어의 자국어화는 언문일치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작업을 수행한 이들이 소설가들이었다. 그들이 작품에 쓴 문장들이 음성언어로 정착해 표준어가 되었고, 그 문장을 일상에서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는 내면이 생겼다. 그러한 내면적 인간에 의해 외부의 풍경이 발견되었고, 그로써 사람들은 타자에 무심해지고 더욱 내면에 침잠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사회성은 떨어지고 공동체성이 강화된 셈이다. 교통은 줄고 교환이 늘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의 언어가 마치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선험적인 무언가라 착각한다. 마찬가지로 내면도 풍경도 원래부터 존재했던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것들은 전부, 아시아에서는 100년, 유럽에서는 400년 남짓 전에 언문일치와 문학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형식에 불과하다. 그러한 전도를 바로보지 못하면 근대 비판은 무용지물이 된다. 근대 비판은 어떤 측면이든 문학 비판적인 측면을 비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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