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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균 Nov 05. 2020

채식주의자를 읽고

독후록


 채식주의자 | 한강 | 창비 | 2007년


1. 작가 소개

2. 줄거리

3. 해외의 평가.

4. 책 속의 문장.

5. 느낀 점


작가 소개.


저자 한강은 1970년 광주 태생으로 연대 국문과 졸업 후 우리가 알고 있는 ‘샘터’ 사 - 은행 창구 앞에 한 권씩 놓여있는 책을 발간하는 회사- 에서 근무를 시작으로 93년에 시인으로 등단 후 이듬해 94년 신춘문예로 당선되어 소설가로 첫 발을 내디뎠다. 2005년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으로 선정되어 이때부터 차세대 한국문학의 기수로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2008년에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 교수로 임용되었다.


《채식주의자》는 2004년 한국어로 발표되어 2007년 단행본으로 출판된 소설이며, 따라서 이 책은 현재를 기준으로 16년이나 된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스미스는 21세 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번역가로  런던대학교에서 한국학 석사, 박사 과정을 전공하고 제3세계 문학을 영국에 소개하는 비영리 출판사 틸티드 악시스 대표를 맡고 있다


이 책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2016년 맨 부커 국제상을 수상하였기 때문인데, 맨 부커 국제상이란, 영국의 문학상으로 영국 연방 작가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맨 부커상(2004년 6월 만들어짐) 보완하여, 2016년부터 맨 부커 국제상으로 개편된다. 따라서 맨부커상은 1969년 영국의 종합물류유통회사 부커사가 제정한 문학상이다. 이후 영어로 번역된 소설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하여, 상금 5만 파운드(약 8600만 원)를 원작자와 번역가에게 제공한다.현재 맨부커상을 후원하는 맨그룹은 1783년도에 창립된 세계 최대 상장 대체투자 운용사 중 하나인데 .2002년부터 18년간 매년 160만파운드(약 23억6600만원)씩 맨부커상을 후원해왔지만 ‘맨그룹’이 내년부터 후원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관련기사 참조)


이 상을 수여한 후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 등 유력 일간지로부터 "한국 현대문학 중 가장 특별한 경험", "감성적 문체에 숨이 막힌다", "미국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등의 호평을 받았다.


먼저 아마존의 평가를 살펴보면



한국사회 내에서는 사회적 관습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스스로 채식주의자가 되고 식물에 기반한 삶을 살겠다는 그녀의 결정은 전복 행위나 다름없다. 이 불안한 소설은 한국의 현대 생활, 그리고 집착과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비틀거림이 되는 시도들에 대한 우화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매우 재능 있는 작가의 인상적인 스토리텔링이다.



모르겠다. 이 책이 무엇인지, 정확히 어떤 지점을 가지고 만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사회적 논평? 정신 질환? 채식주의? 신경성 식욕 부진증? 남용?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고 이야기 도중 영혜의 관점에서 기술된 내용은 없다. 따라서 철저히 영혜의 생각은 블라인드 처져 있다. 관점은 그녀의 남편, 그녀의 형부, 그리고 그녀의 언니 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꿈을 꾸고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가족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의 남편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특별히 따뜻하지 않았다. 가정 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정신병이라고 결정한다. 


파트 2에서는 형부는 그녀의 생각에 이상하게 집착한다. 그들은 타협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는 이상한 부분이다. 파트 3에서는  주인공 영혜의 죽음 직전, 그녀는 자신의 언니의 집에 기거하며 벌어지는 일들이다. 점점 더 미처 가는 모습. 정신은 말짱한 것 같지만 점점 미처 가고 나무가 되어가고 싶어 하는 주인공 그러면서 책이 끝난다. 이번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80명 이상이 공감을 표하는 한 독자의 소견이다.


소개는 이것으로 마치고 책으로 들어가 보자.


전체적인 줄거리는 출판사 줄거리 부분의 내용을 발췌하였다. 주인공 영혜를 둘러싼 세 인물, 영혜의 남편·형부·언니의 시선으로 구성되는 3부작이다.


『채식주의자』의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인 ‘나’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이 뇌리에 박힌 영혜는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에 사로잡혀 육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영혜를 말리고자 한다. 영혜의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는 또 육식을 거부하고, 이에 못마땅한 장인이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영혜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긋는다. 


2부 「몽고반점」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 ‘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사는 동생을 측은해하는 아내 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영혜의 몸을 욕망하게 된다. ‘나’는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 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벌거벗은 영혜의 몸에 보디페인팅을 해서 비디오로 찍지만, 성에 차지 않은 ‘나’는 후배에게 남자 모델을 제안한다. 남녀의 교합 장면을 원했지만 거절하는 후배 대신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영혜와 교합하여 비디오로 찍는다. 다음날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아내가 발견한다. 


3부 「나무 불꽃」은, 처제와의 부정 이후에 종적 없이 사라진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가족들 모두 등 돌린 영혜의 병시중을 들어야 하는 인혜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영혜가 입원한 정신병원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인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만나고,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려는 의료진의 시도를 보다 못한 인혜는 영혜를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심한다. 


기억에 남는 문장.


오직 한 가지 아내에게 남다르다는 점.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흥분의 요소이자 무언의 신호인지 처음 알았다_11 page


이것은 유혹의 신호였던가? 지난날 흐릿한 기억들을 더듬어 보지만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고 특별히 유혹을 한 것 같진 않았는데.. 


M의 아랫배가 그의 아랫보다 더 동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을 눈여겨보며 그는 열쇠를 받아 들었다. 드러내지 않을 뿐. M에게도 욕망이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번민이 있을 것이다. M의 감춰진 결핍과 동그란 배의 선이 드러내 주는 데에서 그는 일종의 옹졸한 위안을 받았다. 최소한 M에게는 살찐 배에 대한 고민, 약간의 수치, 무너져버린 젊은 날의 육체에 대한 그림움쭘은 남아있을 것이다_몽고반점 97page 


나 역시 나보다 조금 더 나온 타인의 배를 보며 그가 가진 삶의 치열함 보단, 그의 게으름이 먼저 느껴졌던 건 바로 그 옹졸한 위로와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느끼고 생각해 볼 점.

상처는 분노로 이어지고 안으로 터지면 자살이고 밖으로 터지면 타살이다.


예전에 읽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의 내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울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위선적이기보다 위약적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균열이 갈 데로 간 도자기는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 나기 마련이다. 울음이라는 것이 작은 돌멩이 하나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모양새를 박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비명도 동반된다. 울음을 터트림으로써 분노를 표출하고 씻어냄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허나 울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절대로 울지 않는다는 것은 울어도 달래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나의 슬픔을 아무도 알지 못하며 달래주지 못한다는 사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던 내용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주인공 영혜의 눈망울에 영혜 언니의 시선 속에 가정법 과거는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아빠에게 어릴 적부터 구타를 당한 주인공 제제가 가장 친한 포르투가 에게 말하는 장면은 영혜의 감성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죽일 거예요. 이미 시작했어요. 권총으로 쏴 죽이는 그런 게 아니에요. 제 마음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 사람은 언제가 죽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를 그만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자각은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폭발한다. 타살이 아니면 자살이다. 여기서 상처는 분노로 이어지고 안으로 터진 고름의 분노는 종국에는 타살이든 자살로 향한다.


두 번째 이 작품의 2부 《몽고반점》은 육체적인 욕망과 예술혼의 승화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수작으로 극찬을 받으며 이상문학상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 점은 내심 수긍이간다.허나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라 아쉬운 부분이다.


육체적인 욕망과 예술혼의 승화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시선은 욕망이라는 단어에 한참 동안 머무른다. 내가 영혜의 감정에 이입되기보단 영혜의 남편과 형부의 입장을 바라보는 것이 남성에겐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욕망’이라는 단어는 ‘변태’와’ 불륜’ 그리고 ‘바람’과 같은 연관 명사로 자연스럽게 매칭 되기에 타인에게 생각의 오염도를 건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입에 담는 것을 꺼리는 건 아닐까? 일상의 토대이자 현장은 바로 ‘욕망’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욕망과 삶을 따로 떼어내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욕망과 함께 살아나가며 하며,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바로 이지점이 생각할 지점이라 여겨진다.


욕망의 총합은 몸이다. 몸은 생명의 근원이자 에너지가 발산하는 곳이다. 식욕을 통해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성욕을 통해 발산과 욕구를 분출한다. 인정 욕구를 통해 관계를 맺는 것도 같은 이치 이리라.  따라서 원초적 식욕과 성욕은 삶의 동력이자 자유로운 행위일 뿐이다. 다만 욕망의 과잉으로 인한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고  그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지혜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삶 속에 지켜야 할 룰이며 삶의 기술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욕망. 그 실체적 진실에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건 아니었는가. 욕망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나대지 말 것을 강조한 우리 사회에선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육체적인 욕망은 매우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다.

따라서 욕망이 없다는 건 불가능하다.


젊은 시절, 집창촌이나 룸싸롱의 화대로 지급되는 직업여성들과의 섹스는 자기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자위행위적 섹스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실 성관계는 없다. 오로지 애욕만 있을 뿐. 여기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상대에 대한 이해와 신뢰다. 


자기만의 환상에 빠진 자위행위적 섹스는 그래서 영원히 채우어지지 않는 혼자만의 갈망일 뿐. 

그래서 하고 나면 더더욱 외롭다. 더구나 외로워지는 중년이라면 그래서 혼자만의 자기 위로적인 자위행위보다는 살맛을 느끼는 섹스가 필요한데 몸에 문신이라니! 예술이라니!  몸에 페인팅 칠했다가 집구석에서 쫏겨나기 십상이다.


나이 든 중년이 섹스를 하기 전에 옷을 벗기를 허락하는 이유는 탄력 있는 몸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론적 살덩어리인 자신의 삶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은 아닐까?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 나야. 

그다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해줘. 물론이다. 나도 너를 이해할 테니 말이다. 


비록 몸에 꽃 모양의 무늬는 없지만 움푹 파인 주름만큼 세월의 무게와 삶의 고통을 이겨낸 얼굴. 그리고 몸의 중부지방에 거대한 대륙을 이루는 맷집과 인자함이 부끄럽지 않다.


젊은 시절에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다. 허나 작금의 시절에 읽고 든 생각은 자명하다.


욕구할 수 있는 것을 욕구하고 

욕구할 수 없는 것은 욕구해서는 안된다. 

혐오해야 하는 것을 혐오하고 

혐오하지 않아야 할 것은 혐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력이 작동하지 않는 욕구는 욕구의 포로가 될 뿐이다.


건강한 이성에 의해 양도받은 왕성한 정력.

양심적인 의지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되는 강렬한 감정.

이것은 공동체의 질서이자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덕이다. 

미약한 감정으로 품격없는 도발이 과연  정당화 될수 있는가.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서구식 사고론 합리주의라 칭하고 동양식 사고로는 순리(順理)라 한다. 이치를 따르는 것. 이치를 따르지 않는 욕망의 결과는 비참한 말로가 수반된다. 


김정운 작가는 욕망을 숨길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과 현실은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살기 때문이라 말한다.

돈만 벌다 보니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지고 결과만 집착하다 보니 이런 꼬라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1. 거대한 지하세계로 접속하여 방대한 포르노의 세계로 입문하자. 가상의 세계지만 쪽박 차는 것보단 났다.

2. 지상에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퇴폐이발소나 안마시술소도 나쁘지 않다. 폐업이 아닌 성업을 하는 그곳엔 김혜수식 풍만한 가슴이 여기저기 보물처럼 숨어있다. 그곳엔 그 가슴에 묻혀 피곤한 하루를 잊을 수 있는 마법 같은 공간이 있다.

3. 마라톤을 익히자. 죽어라고 달리는 ‘마라톤'. 이봉주도 일 년에 완주하는 횟수는 3~5회에 불과하다. 근데 마라톤 하는 사람들은 일 년에 10회 이상 달린다. 이는 건강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학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 사람은 이 방법 외에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정기가 강하다 정기가 약하다고 표현하는데 표출되지 못한 정기를 올바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

정의 질료는 신장에서 오며. 신장은 푸샵이나 아령으로 분출하자. 기의 질료는 폐에서 나온다. 튼튼한 폐를 가진 자여! 러닝머신이나 수영장에서 자신의 정기를 발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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