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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남자 Sep 17. 2015

4차원의 혁명적 미술가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오늘 준비한 글은 그 이름도 위대한 피카소 입니다.

생애 5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피카소.

앙드레 말로를 위시하여 수많은 글쟁이들이 그를 위한 책을 써내기도 했습니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는 뎃생 교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미술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회 변두리의 형상화

두 번째, 서커스의 세계 입체주의의 기초를 완성한 작품으로 이때 완성한 작품이 ‘아비뇽의 처녀들’ 입니다.

세 번째, 입체주의를 기반으로 한 고전주의로의 회귀

1920년대 말, 피카소는 인간과 황소의 중간적 존재인 미노타우르스와 투우에 열중하면서 판화 연작인 ‘미노타우로스의 싸움’을 제작합니다. 이후에는 불후의 명작인 ‘게르니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20세기 유럽의 미술을 지배한 피카소는 혁명가와 동시에 전통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 중 제가 엄선한 작품들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1. 아비뇽의 처녀들 

우선은 제가 직접 봤던 작품부터 소개해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뉴욕 MOMA에 소장되어져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투영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이 작품은 현재 세계에서는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발표 당시만 하더라도 미술계의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 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이라는 서양 미술의 양식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아름다움과는 동 떨어져 있으며 괴기스럽고 흉측스럽게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림 자체가 갖고 있는 표현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상의 단면으로 봤을 때는 여간해선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화두는 바로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미술은 르네상스 이후 원근법을 화폭에 적용해 실물과 거의 흡사한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역시 그 원근법을 완벽하게 재현한 사람만이 화가들의 가장 높은 자리에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시대적으로 그러한 원근법의 지배는 최초의 사진기인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기계를 사용해 실물과 똑같은 효과를 낼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근법에 몰두할 때 피카소는 이러한 원근법의 모순점을 깨닫고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원근법을 도입한 카메라를 가지고 수많은 실험을 했고 그 실험을 통해서 얻은 잔상을 수많은 밑그림으로 그리면서 원근법은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고 합니다. 작품 속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후 각 시점에 따른 작품들을 스케치하던 작업들이 수 백점을 넘어서 한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2. 게르니카 

다음은 ‘게르니카’입니다. 현재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에서 관람이 가능합니다. 제가 사진 찍으려고 시도하다가 3번이나 저지당한 끝에 쫓겨나고 무료 관람이 가능한 일요일에 다시 한 번 시도하려다 결국 출입 제지까지 받았습니다ㅡㅡ;;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게르니카라는 스페인의 작은 도시가 무참히 파괴된 상황에 대한 피카소의 분노와 절규의 작품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미지와 장면들을 따로 따로 에스키스를 그려서 각각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조합해서 한 장으로 만드는 작업을 거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역작으로 45점의 드로잉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만의 감정, 왜곡과 변형이라는 시도의 그 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이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제가 리치로 4번 정도에 조금 못 미쳤던 것 같습니다. 엄청난 사이즈의 벽화랍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어수선한 참상이 그 소재들을 빌어 파노라마를 그려 냄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역사적으로 승화시키는 요소로 표현했습니다. 그림 속 횃불과 상단의 전등 등은 전쟁을 고발을 위한 그의 의지와 희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작품 속에 사건의 갈등 요소를 삽입했는데 이를 통해 역사적인 메시지와 공감대의 형성을 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 2차 세계 대전을 모두 겪은 피카소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인간말살의 전쟁과 파괴에 대항하여 그림이라는 표현수단으로 예술적 항거를 강렬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의 파과와 전쟁의 비참함, 이 모든 괴로움이 이 한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3. 한국에서의 학살

마지막 작품은 바로 ‘The Massacre in Korea’ 한국에서의 학살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났던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내용의 작품으로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임산부, 소녀, 어린이 등을 총살하려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51년 파리에서 처음 전시할 무렵 각계 반응과 평가가 분분했는데, 비평가들은 작품의 예술성이 약하다며 폄하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공산당 측은 미국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항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면서도 살인자의 실체가 불분명하자 정치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여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과 멀어지게 되는 계기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미국 내에서는 이 작품이 한국전쟁 중 있었던 미국의 잔학행위를 비난한 것으로 반미선전물로 분류되기도 했었습니다. 시야의 한계 때문이었는지 미국 내에서 전시가 처음 진행된 것은 피카소의 사후라고 합니다. 

신문 지상을 통해 전쟁 소식을 접하고 그걸 모티브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이 작품을 만들었던 피카소. 꼭 한국전쟁에 국한되어 작품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그 참상과 아픔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사실 피카소는 입체주의에 이르기 전 기존 화가들과 그 맥락을 같이 했었습니다. 

지난 첫 번째 글에서 등장했던 벨라스케스를 평가하기를

'벨라스케스가 최고이며 엘 그레코는 위대한 몇몇 대가들 가운데 속하는 반면, 

무리요는 별로 감동을 주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피카소의 초창기 유화




한 길은 외롭고 고독합니다. 작가가 활동하면서 만드는 작품이라는 것이 시대와 배척될 수록 더욱 외롭고 고된 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그들의 삶을 우리는 새롭게 조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나 다운가, 세상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나는 여전히 나 인 것인가

타협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당장의 많은 문제들로부터, 내일이 있어야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는 스스로가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기에...

오롯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 가장 나 다운 길을 갈 수 있기를

책 읽어주는 남자가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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