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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남자 Aug 29. 2016

타인의 삶

내 인생 최고의 영화 No. 2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떤 영화를 내 인생의 2 번째 영화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헝거’, ‘타인의 삶’, ‘스카페이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쉰들러 리스트’, ‘도니 브래스코’, ‘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저수지의 개들’...

그래도 이 중 제 개인적인 견해에 이견이 없는 두 작품을 꼽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여쭙고 한 편을 어렵사리 꼽았습니다.




너의 모든 것을 알아내겠다.

The Lives of Others, 바로 ‘타인의 삶’입니다.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과거 동독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사찰을 배경으로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정치적 혼란 시기. 동독의 독재 정권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친 서독 성향이 확대되어가는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고자 대대적인 규모로 국민들을 삶을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동독 정부는 To Know Everything이라는 목적 하에 무려 10만 명의 감청 요원과 20만 명의 스파이를 양성함으로써 그들의 정보망에 걸려든 사람들을 강제로 구금하고 가족을 볼모로 온갖 협박을 일삼는 등 비인간적인 강경책을 펼칩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비즐러는 동독 정부의 국가 보안국에서 근무하는 비밀경찰로서 친 서독 경향을 보이는 인물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20년 만에 재회한 친구로부터 연극  공연을 보자는 제안을 받고 자리에 참석하는 비즐러는 좌파 성향을 가진 당대의 인기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이자 인기 여배우인 크리스타를 보면서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하길 의도했던 친구에게 스스로가 도청을 하겠다고 나서는 비즐러. 이후 영화는 타인에 대한 의심과 감시로 매 순간을 강박적으로 살아가던 비즐러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는 두 예술가의 삶을 통해 새로운 신념과 따스한 온기를 얻어가는 과정을 진중하게 묘사합니다.




그는 근무 시간 동안 온갖 망상과 의심으로 타인의 삶을 철저히 감시함으로써 국가의 총애를 받는 유능한 국가 공무원이지만, 텅 빈 집으로 돌아온 저녁 시간에는 혼자 먹을 초라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유리창 너머 펼쳐지는 타인의 행복한 삶을 또다시 감시하면서 보낼 수밖에 없는 허무주의로 가득한 중년 남자입니다. 집으로 불러들인 시간제 매춘부와의 격렬한 정사 후 그녀에게 잠시만 더 함께 있어달라며 매달리는 장면은 그의 외로움과 그가 살아온 세상을 강하게 대변해 줍니다.





반면 드라이만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크리스타라는 사랑스러운 여인과 함께하며, 각계각층과 교류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다양한 의견을 피력하며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런 드라이만의 삶은 자유를 갈망하지 않고, 변화를 기대하지 않은 대다수의 동독인들과 같은 소우주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던 비즐리에게 바람을 몰고 오기 시작합니다.




한편 드라이만의 정서가 더욱 고취되는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알버트의 죽음입니다.

“더 이상 이 나라를 참을 수가 없어. 인권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지.” “모든 시스템이 날 미치게 해.”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걸작이야. 다음 생애에도 작가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감시를 당하던 드라이만의 친구 하우저와 알버트의 존재는 기폭제가 되고 드라이만은 이를 실천하는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게 됩니다.




감청이라는 직업적 책임 의식에서 벗어나 드라이만의 삶을 흥미진진한 자신만의 소우주이자 연극 무대로 간주하기 시작하는 중반부터 비즐러의 캐릭터는 극적으로 변해갑니다. 좌파 연출가라는 이유만으로 국가로부터 예술 활동을 차단당한 늙은 연극 연출가 알버트가 드라이만에게 선물한 ‘브레히트’의 시집을 몰래 훔쳐 읽으며 감상에 빠지는가 하면, 알버트의 자살 이후 알버트가 선물한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악보를 꺼내 들고 연주하자 감청 헤드폰으로 듣던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 눈물은 정서적인 감흥에 대한 감격과 더불어 그동안 이를 가까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색무취한 삶을 떠올리며 느끼는 비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비즐러 스스로 오로지 국가관과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무의미했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사회주의 혁명가인 니콜라이 레닌이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 음악(베토벤의 열정 소나타)을 계속 들을 수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혁명을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을 이 영화에서 인용합니다.

“진정으로 이 음악을 들은 누군가가 더 이상 나쁜 사람일 수 있을까?” 연주 끝에 드라이만이 뱉은 이 말은 비즐러의 심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도너스마르크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배경과 맞닿아 있습니다. 감독은 삭막한 분위기의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헤드폰을 끼고 사실은 듣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눈물 흘리는 한 남자의 이미지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영화가 부쩍 흥미로워지는 것은 초반의 연극 무대 장면처럼 두 예술가의 삶을 관객의 입장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비즐러가 그들의 삶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입니다. 배우로서의 경력과 드라이만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문화부 장관과의 추잡한 불륜 스캔들을 드라이만이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장면. 크리스타에게 불쑥 나타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진지하게 충고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는가 하면, 최고조의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제 그에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단순한 감청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가치를 지닌 인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타인의 삶에 소리 없이 침투해 파멸을 일삼던 그가 이제는 타인의 삶을 통해 결핍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람이란 무엇인가, 왜 자유를 갈망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잔혹한 성인들의 동화였던 ‘판의 미로’보다는 비인간적인 독재 정권을 배경으로 인간의 원론적 본능인 관음증이란 소재를 통해 보편적인 감동과 휴머니즘을 이끌어낸 ‘타인의 삶’ 쪽이 2007년 아카데미 위원회가 왜 최고의 외국어 영화로 꼽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기존의 도감청 혹은 관음증 소재의 영화들이 이로 인한 인간성 파괴와 윤리적인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룬 반면, 타인의 삶은 도청하면서 오히려 그 삶에 감화되어 표현의 자유와 살아있음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강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비즐리를 보면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책에서 나온 구절들이 떠오릅니다. 이 책은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1년 반 동안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 상황을 서술한 것으로,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했고 재판 당시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이 영화의 가치는, 바로 어떤 행위를 할 때나 그것의 정당성을 판단할 때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가 의도치 않는 사회의 비극을 직/간접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음을, 반대로 주인공처럼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깨닫고 생각을 행동한다면, 결국 그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부보다는 많은 분들이 아직 접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더 이상의 Spoiler는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재미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대적 암울한 배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다움을 그려내고 폐쇄적인 사회적 모습 속에서 변화의 바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뜨거운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며, 자신을 지켜내는 모습보다도 더한 가치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비즐러의 강박적인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한 배우 울리히 뮈흐는 정말이지 놀라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비즐러의 심리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영화에서 그리 구체적인 장면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가정에 동화되어갈 수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배우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벽한 극본과 탄탄한 연출, 심리적 연기가 돋보인 이 영화는 높은 완성도를 넘어서서 이미 위대한 영화에 올라섰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퀄리티가 출중하다거나 한상 가득 차려진 스페셜 피처를 만날 수 있는 타이틀은 결코 아니지만, 영화 자체만으로도 소장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타인의 삶’은 전혀 고루한 예술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극적인 재미를 지닌 ‘피아니스트’, ‘굿바이 레닌’, 최근 개봉한 ‘프리즈너스’처럼 가슴 졸이는 스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연출이나 히치콕식 음악 등은 언뜻 스필버그의 ‘뮌헨’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이퀼리브리엄’이 보여준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영화로 스펙터클이나 현란한 시각효과가 아닌 탄탄한 이야기와 매력적인 배우의 만남이 돋보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민간인 불법사찰이라는 망령이 되살아났습니다. 천연두처럼 벌써 오래전에 이 땅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야만적인 범죄행위가 마치 말라리아처럼 이 시대에 국가기관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개탄스러운 건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위협을 마치 선거 이슈의 하나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일부의 뒤틀린 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영의 논리를 넘어 시민에 대한 불법적인 사찰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질적인 범죄라는 인식의 공유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타인의 삶’은 이런 우리 시대에 경종이 될 수 있는 영화이며, 시스템이 우선이 아닌 사람이 우선인 그런 세상을 기대해봅니다.



끝으로 영화 속 비즐러의 마지막 대사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Nein, das ist fur m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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