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젬툰 Nov 05. 2018

야!!! 제발 썸 타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오빠 곱창 사주세요 왜냐면 제가 곱창이 먹고 싶으니까요.”


뜬금없는 카톡이었다. 아는 여자 1호. 작고 귀엽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

그 여자와의 의미없는 몇 줄 카톡이 어어지다 툭, 하고 내게 던져진 문장이었다.

언제 먹을까 어디서 먹을까 의미있지만 알맹이는 없는 몇 개의 대화가 핑퐁처럼 왕복했다.

그리고 내게는 중요한, 어쩌면 핵심인 질문을 던졌다.


“멤버는?”


단 둘이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는 아는 여자 1호.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멤버 모아 볼까요? 저는 둘이 먹어도 상관없지만.”


앞 문장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 문장이 중요하다. 두번째 문장을 긍정하되

조급해 보여선 안 된다.


“내가 사는 거니까 멤버는 적을 수록 좋지. 너랑 나. 콜.”


만나기로 한 날. 메뉴는 바뀌었다. 그녀가 그 사이 곱창을 먹었기 때문.

우리는 제주도 근고기로 유명한 합정동의 그 고기집에서 만났다.

술을 잘 못 먹는 그녀. 폭음과 과음이 일상인 나.

내가 소맥을 다섯잔 비울 때 쯔음 그녀의 두번째 맥주잔이 바닥을 보인다.


“너랑 나 밖에 없는데 속도 좀 맞추지?”


그녀는 항상 술을 마시면 빈곤해지는 내 기억력을 갖고 놀리기를 좋아했다.

자기가 그 때 무슨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든지

그 때 오빠가 술에 취해서 이런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나냐는든지

아이큐 149에 빛나는 명석한 내 두뇌를 비하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 했다.


1차가 끝나고 맥주집으로 갔다.

의미없는 대화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묻는다.


“오빠는 썸이 뭐라고 생각해?”


나의 단점이 빈곤한 기억력이라면 그녀의 단점은 맥락없음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뇌세포를 운동시켜 대답을 생각해낸다.


“썸? 그거 고백하면 차일까봐 무서운 기간 아니야?

여자가 뭐라고 대답할지 확신이 없는 시간.”


그러자 반문한다.


“오빠는 요즘 썸 타본 적 있어?”


고민한다. 여기서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가 질투할까?

아니면 없다고 대답하고 외로운 사람인 듯한 인상을 줘야할까?

아니다. 어떻게 대답할지 모를 때는 반문이 가장 좋은 대답이다.


“너는 어떤데?”


내 문장의 물음표에 점을 찍기도 전에 그녀가 대답한다.


“나는 있어.”


“누군데?”


“누군진 말 못하지.”


“왜 썸이라고 생각하는데? 니가 생각하는 썸은 뭔데?”


질문의 주도권이 나에게 왔다.

이제 묻는 사람은 나고,

대답해야하는 사람은 너다.


“내가 생각하는 썸?

음...

첫째로는 단 둘이 만나는 사람.”


‘어? 너랑 나랑 지금 단 둘이 만나고 있잖아.’


“둘째로는...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고

대화가 편안한 사람.”


‘야 너 나랑 맨날 카톡하잖아.

저번주에는 세 시간동안 통화도 했잖아.

그리고 오늘 우리 편하게 만나고 있잖아.’


“마지막은...

서로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


‘비밀?

비밀...

오늘 우리가 단 둘이 만난거,

이거 너랑 나를 아는 사람들이 알면

되게 애매해지는 상황 아니야?

오늘 너랑 나랑 둘이서 밥먹고 술 먹는게 우리 사이에

생긴 정말 큰 비밀 아니야?’


이제는 공이 나에게 왔다고 확신했다.

내 차례다.

그녀의 혼잣말에 속으로만 대답하지 말고

무언가 내뱉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마음을 채웠다.


“너 지금 되게 뱅뱅 돌려서 말하는 느낌이야.”


“응?”


“니가 썸타고 있는 사람, 나야?”


그녀의 “응”과 나의 저 물음은 찰나의 호흡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영겁의 시간과도 같았다.

말해도 될까 말까, 될까 말까,

수 만번의 고민이 저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서 반복됐다.

하지만 나는 내뱉었고 그녀는 대답했다.


“…뭐라고? 푸하하하하하…”


그녀가 웃는다.

웃음소리가 가게를 가득 매운다.

나의 표정은 거울이 없기에 알 수가 없다.


“나랑 오빠랑? 오빠 지금 무슨 생각한거야? ㅋㅋㅋㅋㅋㅋ”


완벽한 모멸.

익숙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나의 무던한 농담이다.


“야이씨, 니가 나 좋아하는 줄 알고 식겁했네 진짜.”


그 후로 그녀의 지리한 연애상담이 계속됐다.

자기는 썸이 싫고, 차라리 내일이라도 자기가 고백하는게 나을 것 같고

그 남자는 외모는 볼품없지만 볼 때마다 설레고

카톡 한 줄 한 줄이 명문이라 한다.


술에 취한 그녀가 탄 택시의 번호판을 외우며

마음 속 메모장에서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지운다.

전혀 아프지도 않고 서글프지도 않다.

아직도 빽빽한 내 메모장의 숱한 이름이 보일 뿐이다.

차인 것도, 이별도 아닌

그저 아는 여자가 이제 모르는 여자가 되는 과정들.


오늘도 차가운 침대에 누워

지운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여자들을

나의 메모장에 아는 여자라 적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양 냉면 먹으러 갔다가 인간 시장 구경한 일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