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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툰 Jul 21. 2020

갑자기 불안할 땐 빨래를 하자.

가끔씩 이유 없는 불안감이 불쑥 등에 업힌다. 그 촉감이 차가울 때도 있고, 무거울 때도 있고 때때마다 아주 다른 느낌이다. 메마른 통장 잔고와 함께, 파란색 주식 잔고와 함께, 회사의 흉흉한 소문과 함께 어쨌든 불안감은 늘 다른 촉감과 낯선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불안감의 모습은 매번 다르지만 그가 찾아올 때의 내 상황은 대부분 비슷한데, 대개 집에 혼자 있을 때다. 유난히 일찍 눈이 떠져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있을 때나, 침대 위의 무료함에 지쳐 거실에 나가 혼자 담배를 피울 때. 하릴없이 인스타그램으로 주변 사람들의 맥시멈 행복 상태를 순회할 때. 그럴 때 불안감이 문득 나를 감싼다.


아무래도 집에 혼자 있다 보면 방 끝까지 도망가도 불안감은 방문을 열면서까지 나를 쫓아온다. 도망갈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축축하고 무거운 불안감을 등에 업고 집 안을 배회하긴 너무나 버겁다. 그럴 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건 별로 좋지 않은 해결법이다. 불안감이라는 정서를 또 다른 정서 활동으로 막아서려고 하면 무슨 책이든 부정적으로 읽히고 무슨 영화든 비극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나는 그럴 때면 빨래를 한다. 빨래통에 낙낙히 찬 빨래들을 하나하나 세탁기에 넣는다. 넣으면서 이 옷을 입었던 날 있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본다. 빨랫감이 된 옷들은 대개 술자리에서 국물이 튀었거나, 운동을 하다 땀에 절었거나, 오래간만에 차려입고 누군가를 만났던 기억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정적인 상태에서 찾아온 불안감을, 활적인 상태의 기억으로 조금씩 지워내 가는 것이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모두 넣으면서 잠시나마 불안감을 지우고 나면 이제 세제와 섬유 유연제를 얼마나 넣을까를 고민한다. 많이 넣으면 옷이 좀 미끌미끌해질 것 같고, 적으면 깨끗하게 안 빨릴 것 같고. 그리곤 무조건 강력 세탁에 다이얼을 돌리고 세탁 시작 버튼을 누른다. 정적과 불안감이 둥둥 떠다니던 집 안에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우우웅 탁. 우우웅 탁. 남은 세탁 시간 1시간 30분. 잠시나마 불안감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세탁기의 소음이 집을 채우기 시작하면 그 소음마저 지우기 위해 음악을 튼다. 큰 고민은 없다. 유튜브 뮤직의 나만을 위한 추천 버튼을 누르고 셔플. 거실의 사운드바에서 언제 들어도 반갑고 익숙한 90년대 가요가 소음과 조용히 섞이는 걸 느끼면서 냉장고를 연다. 차가운 물을 한잔 마시고 락앤락 뚜껑을 하나씩 열고 밥 먹을 준비를 한다. 좋아하는 반찬과 그다지 안 좋아하는 반찬을 번갈아 먹어가며 남은 반찬의 양을 조절하면 어느새 햇반 한 그릇 뚝딱. 밥을 먹었으니 이를 닦아야 하고 이를 닦는 김에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로 온 몸을 닦아내고 스킨을 바르고 바디 스프레이를 뿌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이렇게 씻고 입은 게 아까워 어디론가 나갈 계획을 세운다. 그즈음 남은 세탁 시간은 20분쯤. 빨래를 널고 나갈까 외출하고 와서 널까 고민을 하다가 20분을 기다리기로 한다. 깨끗하게 씻은 몸과 야트막하게 멋을 부린 옷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며칠 째 진도가 나가지 않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무릎에 올린다. 글자와 그림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페이지가 가볍게 넘어간다.라고 느낄 무렵 세탁기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나에게 소리친다. 빨래를 꺼내 세탁함에 담아 베란다로 간다. 수건과 속옷 양말의 순서대로 차곡차곡 건조대에 넌다. 베란다 문을 닫는다. 그리곤 다시 책. 읽다 만 부분이 못내 궁금해 몇 장을 더 넘기다 나갈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현관으로 향한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어느새 등에 업혀있던 불안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실컷 나를 쫓아다니다 베란다 빨래 건조대 근처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다.


불안감이 다시 따라올까 얼른 현관문을 열고 나선다. 오늘도 난 이렇게 불안감과 이별한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축축한 불안감이 자꾸 나를 따라다닐 땐 빨래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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