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와 걷는 일상
개와 함께 하며 맞이한 가장 큰 변화는 계절을 오롯이 느낀다는 점일 것이다.
나의 개를 만나기 전까지 '걷기'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가끔 업무로 과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광화문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광기를 발휘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도 걷기는 잡생각을 없애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월 60만원을 받는 인턴생활이 처절해서, 생각지도 못한 가까운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서,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걷고 또 걸었다. 높은 구두를 신고도 휘청이지 않고 야무지게 걷던 거리에는 (당시에는 힐을 신고 비틀거리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을밤의 서늘함과 나만 빼고 즐거워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럴 때면 온 세상천지가 나만 빼고 잘만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대상도 없는 분노에 많이 힘겨웠다. 그렇게 학대 같은 걷기를 하고 나면, 침대로 곧장 직행해 또 다른 하루를 맞는 무료한 일상을 시작했다.
불안함이 또다시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 불현듯 나이를 계산해 가며 미래를 점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에도 없던 인생의 선택지를 그리면서, 정말 예상 못한 결정을 한 뒤 선배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인생은 선택과 불확실성의 연속이라는데, 그럼에도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나라서 '개를 제대로 키우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차분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나의 개와의 만남도 계산할 수 없는 가변적인 일이었기에 지금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 나의 개와 함께하는 지금을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개를 키우지 않았을 테니까.
많게는 하루 세 번, 적어도 하루 두 번은 나의 개와 함께 걷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혼자 인생을 살던 그 시절에는 걷기가 잡생각을 없애는 학대의 일종이었는데, 지금은 걷기가 나의 개와 교감하고 계절을 느끼는 매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느 가을날에는 문득 나의 개와 걸으며 그간 없던 카페가 새로 생겼음을 깨달았다. 동네 어귀 담벼락에 5월에는 새빨간 장미가, 8월에는 나팔꽃이 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면식도 없는 아줌마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그에 못지않는 미친놈을 만나 경찰서를 들락거리기도 한다.
그렇게 365일 매일 두 번을 걷는 견주는 반강제적으로 강해진 체력과 좋지 않은 무릎 건강을 가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웃들과 반강제적으로 만나 늘어난 아주 조금의 사회성도.
아주 덥거나 추워도 나의 개와 걷기를 멈출 수는 없다. 그렇게 365일 조금씩 변해가는 계절의 감각을 오롯이 느끼며 나의 개와 걷고 또 걷는다. 때로는 이런 나의 걷기가 일종의 수행같이 느껴진다.
아마 나의 개는, 걷기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내게 온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전생에 게으른 하마였어서 벌을 받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