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봄밤> 유지호 분석하기
안판석 PD는 MBC 출신이었다. <하얀 거탑>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연출이 동일인물이라니! MBC와 연이 깊은 건 안판석 PD뿐만이 아니었다. <아마존의 눈물> <남극의 눈물>로 유명한 김진만 PD의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곰>에선 정해인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게다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보여준 안판석 PD와 정해인의 케미까지. <봄밤>은 쓰리 콤보(3 Combo)를 장전하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날뛰는 심장을 움켜쥐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봤으므로 차기작 <봄밤>에 거는 기대가 컸다. 안판석의 연출을 신뢰했고 정해인의 연기(라 쓰고 얼굴이라 읽는다)가 그리웠다. 한지민의 캐스팅 소식을 듣자 정해인이 극 중 연하남일 거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누나들을 구원해줄 마음 좋은 미소를 떠올리며 5월 22일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첫 방송, 정해인은 내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너무도 어린 모습으로 “난 아이가 있어요.”하고 말해버리는 이 남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윤진아(손예진 역)는 35세, 서준희(정해인 역)는 31세로 네 살 차이의 연상연하 커플이었다. 문득 이정인(한지민 역)과 유지호(정해인 역)의 나이가 궁금해진 나는 <봄밤>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봄밤> 이정인과 유지호는 35세 동갑내기였다. 아무리 동안이라 해도 35세 약사, 저 미모 가능한가요? 그리고는 잇따라 여러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왜 동갑이어야 했을까, 어떻게 동갑일 수가 있지, 아무리 나이 들어 보이려 애를 써도 힘들지 않나, 나이 들어 보이려는 노력을 하긴 한 걸까, 왜 더 어려 보일까. 결국 모든 질문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정해인, 왜 앞머리 내린 거야? 31세였던 서준희보다 더 어려 보이잖아.
그래서 꼼꼼히 따져보기로 했다. 왜 그는 앞머리를 선택했는가? 4:6 정도로 보이는 저 가르마는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는가? 도대체 ‘유지호’는 어떤 캐릭터이기에 정해인을 앞머리 내리게 만들었는가?
정인이 보낸 ‘계좌번호요!!!’ 메시지에 끝내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지호는 돌연 코트만 챙겨 어디론가 달려간다. 택시까지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지호의 친가. 그곳엔 6살 난 어린아이가 자고 있다. 아이의 방에 들어가 아이가 자는지 조심히 확인한 후 머리를 쓰다듬던 지호에게 선잠에서 깬 아이는 외친다. “아빠!” 지호의 눈, 입 꼬리, 손끝에서 아이를 향해 쏟아지는 사랑이 느껴진다.
지호는 한 아이의 아빠다. 아빠라기에 어리고 미숙해 보이는 지호는, 아이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튼튼한 울타리가 된다. 셈할 수 없는 사랑이 마구 흘러넘치는 그의 눈빛만으로 지호가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를 빼놓고는 유지호라는 캐릭터를 설명할 수 없다. 유지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였다.
이성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지호는 아이를 먼저 떠올리는 캐릭터다. 누구보다 따스하고 넓은 품을 가진 아빠이자, 진중하고 무거운 모습이 더해진 젊은 남자다. 이런 캐릭터라면 짧고 강렬한 스포츠머리가 잘 어울릴까, 무난하고 차분한 댄디컷이 잘 어울릴까? 후자라고 생각한다. 배우 정해인도 연출 안판석도, 김은 작가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리라. 배우 정해인이 선택해야 했을 머리 스타일은 단순한 ‘스타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감히 예상해 보건대 (상대 배우에 비해) 다소 젊어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캐릭터가 가진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진솔하게 전해지길 바랐으리라. 그의 선택에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MBC가 드라마 왕국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왜일까요?”라는 물음에 언젠가 그런 답변을 한 적이 있다. 어릴 적 제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MBC 드라마에는 사회적으로 던지는 메시지가 명확히 있었어요. <커피프린스 1호점>은 동성애를 공론의 장에 올려놓았고, <내 이름은 김삼순>은 강요되던 여자 주인공의 외모에 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회적 역할을 전혀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제가 최근에 본 드라마 중 가장 메시지가 강렬했던 드라마는 <눈이 부시게>였습니다. 시청자들이 바라는 MBC 드라마는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같은 대답을 해보고자 한다. 쉬이 지나칠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던지는 메시지가 또렷한 드라마 왕국 시절의 MBC 드라마, 내가 바라는 <봄밤>의 모습이다.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여자의 말에, 유부남은 아니지만 아이는 있다고 말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제까지 드라마에 없던 '미혼부' 캐릭터를 정해인이 어떻게 고민해 연기하고 풀어낼지 기대한다. 시대에 한 획을 그었던 MBC 드라마의 뒤를 이을 드라마가 되기를. 진솔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MBC 9시 수목 드라마의 문을 연 <봄밤>에 응원의 한 표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