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은 누구의 손끝에서 시작되는가
독서 모임에서 한 선배가 두 개의 시를 나누어주었다. 첫 번째 시(「고백」)는 손끝에서 흘러나온 땀방울 같았다. 단어들은 숨을 쉬고, 묘하게 모순적이며, 그래서 진지했다. 나는 그 시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길을 잃고 싶었다. 선율은 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 시는 내 감정을 자극하며, 나의 존재를 흔들었다.
두 번째 시(「빛을 걷는 사람」)는 달랐다. 단정했다. 잘 짜인 구조, 낮은 감정의 온도, 일정한 리듬. 차가운, 기계적인 어조였다. 그런 느낌이 들자, 선배가 말했다.
“자, 두 시 중 하나는 사람이 썼고, 하나는 AI가 쓴 건데, 어느 시가 사람의 것인지 맞춰보자.”
순간, 동아리방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우리는 다시 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감동을 주었던 시가 기계가 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판단을 유보했다.
러다이트, 올림픽, 그리고 창작의 주체성
19세기 초,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뿐 아니라 존재가 위협받는 시점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로 인간은 기계에서 효율성을 가져오고, 그 안에 숨겨진 감정과 몸짓을 인간 고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올림픽의 트랙 위에서 우리는 동일한 질문을 마주한다. 기계처럼 훈련을 받은 선수들이 만드는 성취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근육의 떨림과 가뿐 숨소리에 있다.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넘어지는 순간, 그 모든 것은 기계에서 볼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몸짓이다.
오늘날 AI가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는 주장은 러다이트의 불안을 소환한다.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기계가 시를 쓰고, 작곡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 기계의 창작물은 진정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AI가 쓴 시나 그림은 완벽하게 잘 짜여져 있지만, 기계가 만들어낸 예술이란, 우리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듯하다. 인간이 창작하는 그 미세한 틈새, 그곳에서 감동이 피어난다.
AI는 효율적이지만, 인간은 방황한다. AI는 정밀하지만, 인간은 흔들린다. AI는 빠르지만, 인간은 기다린다. 이 간극, 예측할 수 없는 여백에서 창작은 시작된다. 문장(文章), 글[章]에 남긴 무늬[文]다. 창작은 문장과 문장 사이여백에 지문을 남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문이 모여서, 파문을 만들고, 우리에게 질문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저작권, 여백을 감당할 수 있는 자
봄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좋았다
빛 속에서 상처 속에서
죽음 속에서
나는 빛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늘에서 말린 옷에는 땀과 피가 배어 냄새가 났다
사랑은 눈이 멀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를 다치게 했다
나는 사랑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시아(SIA), 「고백」(『시를 쓰는 이유』) 중 일부
AI 시집 『시를 쓰는 이유』에 있던 시 「고백」을 처음 읽었 때, 묘한 감각이 스쳤다. 선배가 쓴 시 「빛을 걷는 사람」보다 더 시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AI가 만들어낸 창작물은 점점 더 정교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질문해야 한다. “그 결과물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동안 창작물과 관련된 논의는 저작권자를 인간으로 한정하지만, 이는 인간이 가진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이제 공간에 관한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 문장은 단어들의 빽빽한 집합이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으로 숨쉰다.
AI는 문장을 생성하지만, 울지 않으며 자신이 쓴 문장을 두고 잠 못 이루지 않는다. AI가 찍어내는 문장들은 언어적 기호라는 표면에 불과하며, 그 심층에 지문을 투명잉크에 묻혀 찍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어둠이 드리워질 때, 우리는 검정색 활자가 담지 못한 무늬를 보기 시작한다.
인간의 창작에 대한 권리는 단순한 “소유(권리)”의 관점이 아니라, “존재(예술하는 사람)”의 질문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을 누가 감당했는가? AI와 인간의 창작을 구분할 수 있는 지점은 그 과정 속에서 여백을 경험한 자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다시 AI가 쓴 시집 『시를 쓰는 이유』를 펼쳐본다. 이제야 감동을 주는 유려한 ‘문장’보다, 그 문장을 두고 서성이고 망설이는 ‘사람’을 더 분명히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