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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나무와 돌아온 인간

by Wooin



이야기는 늘 풍요로운 곳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모든 것이 반복된다. 나일강이 넘치고, 검은 땅은 생명을 낳고, 태양은 매일 밤 지하의 강을 건너 되돌아온다. 이집트의 세계는 무의식적 안정성 속에 움직이는 우주의 제의다. 신들은 형상이고, 질서고, 죽음이며, 재생이다. 오시리스는 죽지만 다시 살아나고, 파라오는 신의 대리자로 땅을 통치한다.


인간은 거기에 있다. 묻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신들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고, 제의를 통해 자신을 보존한다. 믿음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명하므로.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 이집트 신화는 인간 무의식의 단단한 억제 상태를 나타낸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기’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반복적인 질서 속에서 자아를 잃어간다. 그 안에서 신화는 억제와 순응의 구조로 작용한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인간이 그 질서에서 미끄러져 나온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자란다. 왕궁에서, 파라오의 질서 한가운데서. 그러나 그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다. 왕자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의심과 갈등 속에 휘말린 존재로, 그는 광야에 선다. 그리고 거기서, 아무도 본 적 없는 불을 본다. 타오르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 순간, 불타는 떨기나무는 더 이상 신화적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얽매이지 않는 자아의 출현을 상징한다. 이 목소리는 단순히 신이 아니라, 내면의 가장 깊은 욕망과 자아의 형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 목소리는 구속된 질서의 부정이자, 신화적 통합의 해체다. 신은 더 이상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무엇도 자명하지 않다. 인간은 이제 자기 의식을 얻고, 그 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단지 존재의 의혹이다. 신화는 무너지고, 믿음이 처음으로 성립되는 지점이다.


모세는 그저 도망친 자가 아니다. 그는 자아의 의심과 깨달음으로서의 출발점을 향해 가는 길을 떠난 자다. 그는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신화에 의해 억제된 인간성을 끌어낼 책임을 맡은 존재가 된다. 이 '야훼'의 목소리는 이제 인간에게 물음을 던진다. "너는 무엇을 믿는가?" 신화 속에서 자아는 기계적인 존재로 반복되었으나, 이제 인간은 선택의 책임을 부여받는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를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간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왕궁의 안온함에 머무는 인간이 아니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신화적 질서에 대한 해체를 위해서다. 그가 돌아오는 순간, 신화는 이미 해체되어 있다. 그는 질서의 한복판에서 그 질서를 파괴하며 자기 자신과 신을 새롭게 설정한다. "이집트를 떠나라." 그 말은 단순한 탈출의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신화적 질서의 붕괴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제 신은 말씀으로 존재한다. 이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무의식의 억제 속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의식의 해방을 선포하는 존재가 된다.


모세의 출애굽은 단순한 사건의 연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화적 억제에서 인간의 자각으로, 암묵적 질서에서 의식적 선택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집트의 신화는 무의식적 규율을, 모세의 신화는 자아의 선택을 제시한다. 자아의 의식은 이제 단순히 존재하지 않음을 넘어서, 자기 존재를 의심하고 새로운 믿음을 요구받는다. 모세는 '이단적' 신앙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그 누구도 예전에 그렇게 믿지 않았던 것을 믿도록 요구하는 신념의 돌파다. 그 신념은 신화적 질서를 해체하고, 인간을 자신이 세운 법칙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우리는 여전히 광야 어딘가에 있다. 질서의 안온함을 뒤로하고, 말씀을 듣는 중이다.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나는 믿는가?" 아니면 "아직도 형상의 세계 속에 머물러 있는가?" 이는 우리가 무의식적 질서에서 벗어나, 스스로 의식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을 반영하는 질문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 속에 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의식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이 질문은 사막의 불에서 시작되었고, 오늘 우리 안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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