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시간, 그리고 우리의 자리
해석은 단지 옛것을 들추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숨을 과거의 심장에 불어넣는 작업이다. 해석학은 전통을 오늘에 꿰어 넣는 실이기도 하고, 현재를 전통 속에 매달아 놓는 바늘이기도 하다. 성서는 더 이상 박제된 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들은, 먼지 쌓인 종이에서 튀어나와 지금-여기, 우리의 귀 언저리를 맴돈다. 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 음성이, 문득 너무 가까이서 속삭일 때의 놀라움. 해석은 이 거리를 걷는 방식이다.
이 거리는 단순한 시간적 간극이 아니라, 이해가 형성되는 ‘사이의 공간’이다—가다머가 말한 것처럼,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전통의 흐름’ 속에 다시 참여하게 된다.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 이 두 신학자는 성서를 낡은 껍질에서 꺼내려했다. 해석의 틀을 뒤흔들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묻는다. 바르트는 “듣는 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청각이 아니라, 영혼의 구조를 깨우는 감각 말이다. 불트만은 다르게 말한다. 성서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세워야 한다고. 낡은 언어를 새로운 맥락 안에서 재배치하는 일.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둘의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시간 안에 어떻게 스며드는가. 그것은 해석학이 마주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인간적 언어로 번역되고, 그 언어가 다시 삶의 시간 속에서 ‘사건’으로 들리는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이다. 해석은 텍스트 너머의 진리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서 사건으로 현전하는 진리의 ‘열림’이다.
1. 해석은 전지적 시점이 아니다
해석하는 사람이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믿음, 그것부터 해체해야 한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흐릿한 창 너머의 풍경 같다. 들여다보긴 하지만, 온전하진 않다. 해석학은 이 한계를 전제로 움직인다. 과거를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 짓는 일이다. 복원이 아닌 구성. 텍스트가 객관적일 거라는 착각—문서비평이나 양식비평처럼 거리 두기를 강조하는 접근들은, 실은 해석자의 위치를 지운 채 해석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어떤 해석도, 그 안에 해석자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해석은 무대 위 독백처럼, 주체와 대상이 서로 얽혀 있는 드라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해석은 존재로의 물음이자, 존재자가 자기 자신에게 열리는 방식이다. 해석자는 항상 이미-이해하고 있는 존재로서, 자신이 던져진 세계 안에서만 의미를 구성할 수 있다.
2. 의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깃든다
“그때 그 말이 무엇을 뜻했는가”와 “지금 이 말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는 단순히 시대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미가 태어나는 이중의 고리다. 텍스트는 항상 현재 안에서 다시 말한다. 과거는 이미 저편에 가 있고, 미래는 아직 이편에 오지 않았다. 지금-여기, 이 순간을 붙잡을 수 있을 때만 과거의 말은 의미를 얻는다. 지금을 담보하지 않는 해석은, 모래 위에 새긴 문장처럼 쉽게 흩어진다.
리쾨르는 이를 “해석의 삼중 구조”로 설명한다—텍스트는 해석자에 의해 이해되며, 그 이해는 다시 세계를 재구성한다. 의미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해석 행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3. 계시는 발견이 아니라 사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들리기를 우리는 바라지만, 계시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건’이다. 말씀이 인간의 삶 안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건 번개처럼 일어난다. 해석학은 이 불꽃같은 사건을 붙잡으려는 손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그 ‘틈’—시간과 존재 사이의 간극 속에서 해석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그 목소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울릴 수 있는가?
계시는 단순히 전달된 메시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근원적으로 열리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현존의 사건’이다. 이는 하이데거적 의미에서의 ‘진리의 탈은(Aletheia)’이며,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모든 해석은 어디에서 읽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때 ‘어디’란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해석자의 존재 상태, 시대적 정서, 문화적 배경 같은 무형의 배경. 철학적 해석학에서 이를 ‘선이해’(불트만), 또는 ‘영향사’(가다머)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그 책도 우리를 읽는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 경험, 언어의 습관까지도 해석의 일부가 된다. 이런 맥락(컨텍스트)이 없다면, 해석은 방향 잃은 나침반이 된다.
해석은 완전한 객관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즉 ‘해석적 자기의식’을 전제로 한다. 이는 해석자의 한계가 해석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을 가능케 하는 조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해석의 역사란 곧,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같은 텍스트에 붙인 전혀 다른 주석들로 엮인 지도다. 그만큼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는 일은 해석의 출발점이다. 자신이 어떤 시선으로 텍스트를 바라보는지 모른다면, 그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다. 의식하지 못한 컨텍스트는 해석의 배경이 아니라, 해석의 족쇄가 된다.
진정한 해석학적 성찰은, 자신이 던져진 이해의 지평을 자각하고, 그것을 타자의 지평과 융합시키려는 대화의 윤리를 요청한다. 이 ‘지평의 융합’이야말로 가다머 해석학의 핵심이다.
텍스트는 정지돼 있지만, 해석은 흐른다. 텍스트가 종이에 박힌 잉크라면, 해석은 그 위에 흘러내리는 빛이다. 컨텍스트가 바뀌면, 텍스트도 달리 보인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 일이란,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독일과 영국에서 탄생한 역사비평은, 교회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읽기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성과 비판의 빛 속에서도 여전히 그 진실을 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성 중심의 해석이 갖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진리는 단순히 논리적 정합성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 깊은 곳에서 ‘현존’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수천 년이라는 시간의 틈은 생각보다 깊다. 그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말과 감각, 사유 방식의 차이를 품고 있다. 우리가 오늘 성서를 읽을 때, 정말 그 말이 ‘진실하게’ 들릴 수 있을까? 교회라는 울타리는 점점 작아지고, 해석자의 감각은 세속의 언어로 채워진다. 성서의 권위는 흔들리고, 해석의 방향도 갈라진다. 보수주의는 과거를 오늘로 끌어오려 하고, 자유주의는 과거를 오늘에 맞게 재조립하려 한다. 둘 다, 그 간극 앞에서 씨름하고 있다.
이 간극을 건너기 위해선 단순한 해석 기술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변화되는 ‘해석적 전환’이 필요하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단지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새롭게 열리는 사건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틈을 좁히려는 시도가 바로 비신화화다. 이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다. 신화를 걷어내고, 그 아래 숨은 의미를 오늘의 철학으로 꺼내는 작업. 그러나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실존주의라는 좁은 방 안에 하나님을 가두었다. 초월은 실존의 언어 속에서 증발했다. 그 결과, 신학은 신의 해석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만 남는다. 신이 사라진 신학은, 결국 신학이 아니다.
해석은 신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 앞에서 인간이 다시 말문을 여는 응답의 형식이어야 한다. 해석은 신 앞에서 벌어지는 존재의 긴장 속에 머무는 용기다.
신학은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을 해체하는 해석은, 신학일 수 없다. 해석은 텍스트를 여는 열쇠이지만, 그 열쇠가 성전의 문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을 연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의 침묵을 불러오는 일이다. 그래서 해석학은 늘 그 끝에 이중의 긴장을 품는다—그것은 한계를 품은 가능성이며, 가능성을 품은 한계다.
모든 해석은 ‘은폐와 드러남’ 사이에 서 있다. 해석은 진리를 완전히 소유하지 않지만, 그 진리를 향해 끝없이 다가가는 ‘희망의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