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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음성

신, 성서, 계시의 감각을 따라

by Wooin


말한다는 건, 반드시 입을 움직이는 일일까.

가을바람이 마른 갈대를 흔들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지 않은가.

깊은 산중에서 물이 바위를 타고 흐를 때, 그 조심스러운 부서짐은 어떤 말보다 선명하게 감각을 흔든다.


신의 말도 어쩌면 그런 방식일 것이다. 말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지만, 존재 깊은 곳에 도달해 무언가를 환기시키는 방식.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신은 말하는가? 아니, 신이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성서의 시작은 ‘말씀’으로 열리고, 종말 역시 ‘말씀’으로 닫힌다. 창세기의 신은 “빛이 있으라” 명령했고, 계시록의 예수는 “곧 오리라”라고 응답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거리가 있다.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통과해 흔드는 ‘감응’에 가깝다.


시인들은 종종 사물들이 말을 건넨다고 말한다.

들판 위에서 핀 한 송이 들국화가 바람에 떨며 시인에게 건네는 한 마디는, 설명되지 않지만 직관되는 어떤 체험이다.

신의 말도 그와 같지 않을까.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지만, 분명히 ‘전해지는’ 말. 이 지점에서 ‘말씀’은 단순한 말의 문제가 아니라, 계시의 문제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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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혹은, 인간의 언어로는 완전히 번역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한다.

이미 오래전 에벨링은 “신의 언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히브리어인가? 헬라어인가? 한국어인가? 어떤 언어로 신은 말했는가?


비 내린 뒤 안개 낀 산등성이처럼, 신의 말은 분명히 거기 있지만 결코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이 말은 문자 너머에 있는 것이다. 결국, 신의 말은 곧 계시이며, 계시는 자기 노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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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물음은 남는다.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성서. 그것은 신의 말인가? 아니면 신의 말이 담긴 기록일 뿐인가?

신의 말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성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성서가 곧 신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창을 통해 달을 본다. 그 창은 소중하지만, 달 그 자체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서는 신의 현실을 가장 밀도 있게 담고 있지만, 신 그 자체는 아니다.


바르트는 이를 삼중 구조로 설명했다. 사건으로서의 예수, 기록된 성서, 선포되는 설교. 이 세 가지는 모두 신의 계시를 가리키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다. 하지만 이 역시 성서 중심의 해석이다.

성서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때로 문자주의로 흘러가며, 신의 말을 살아 있는 사건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책장에 꽂힌 채로 닫혀 있는 성서에서는 더 이상 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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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서와 계시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라쇼몽과 같이, 성서 또한 신을 완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을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경험한 이들의 증언에 가깝다. 성서는 신의 현존을 ‘말’로 고정하려 했던 인간의 시도이자, 동시에 그 고정불가능성을 드러내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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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것은 신의 말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달하는가이다. 그것은 문자로, 기록으로 도달할 수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해석을 통해 살아나는 사건이다.

불꽃이 아니라, 불꽃을 바라보는 눈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떨림.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록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계시가 다시 일어나는 자리에 서는 일이다.


신은 인간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불꽃, 구름, 바람,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이 존재는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가장 내밀한 층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실재다. 하이데거적 “존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호렙산 가시떨기에서 불타는 나무를 바라보던 모세의 눈동자처럼, 그 감각은 말이 되기 전의 말, 세계가 인간을 깨우는 첫 목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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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은 단지 성서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사건을 현재 속에서 다시 감각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신의 말이 언어 너머에서 인간에게 도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흔적과 울림을 해석하려는 작업이다.

성서는 이 신학 작업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지만, 그것 자체로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신을 본다. 하지만 그 신은 언제나 숨겨진 신, 드러나되 완전히 노출되지 않는 존재이다.


말은 산맥 뒤편에서 부는 바람처럼, 존재를 가로질러 다가오고, 때로는 우리의 삶 깊은 곳에 흔적 하나 남긴 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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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늘 말하고 있다. 성서는 그 메아리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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