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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Nov 04. 2023

너무 외로울 땐 어떡하나요


A.

지인 A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결핍이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것 같아요. 결핍은 사람을 입체적으로 만드니까요." 그런데 그러고 잠시 뒤에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 멋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아까는 결핍이 있는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했으면서, 왜 지금은 온전한 사람이 멋있냐고 하느냐, 그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A는 조금 생각하다가 "각각의 매력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스스로 온전한 사람을 잘 보지는 못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B.

친구 B는 약 일 년 전 이직한 뒤로, 아침에 알람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아프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회사에 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괴롭다는 것이다. 원래 일을 좋아하고 워커홀릭 기질이 있던 B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작은 스타트업에서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기쁨도 잠시, 연차로 따지자면 주니어에 해당하는 B는 새로운 회사에서 본인에 역량에 부치는 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수평적인 조직을 지향하는 그의 팀에는 업무를 알려줄만한 사수도 따로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B는 자신이 일을 못한다는 자책감에 휩싸였다. 이전에 일을 좋아하는 이전 회사에서 무능한 인턴 직원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능하게 보는 것이 끔찍하고 두렵다고 말했다.


C.

모임에서 만난 문화예술을 하는 연극인 C는 작년에 코로나 시대를 맞아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여러 명이 있는 광장에서 "우리 안에 코로나 환자가 있다"며 그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을 플래시몹처럼 즉흥적으로 표현한 퍼포먼스였다. 그는 처음에는 화기애애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분위기가 바이러스처럼 퍼져갔다고 말했다. C는 이 퍼포먼스가 끝나고 관람객과의 대화에서 여러 의미 있는 이야기가 오갔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들은 왜 외로울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스스로 답했다. "제 생각에는 너무 완벽한 관계를 꿈꾸기 때문이에요. 본인이 원하는 이상적인 관계가 되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오다

나는 코로나 시기에 유례없는 코로나 블루를 맞았다.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주위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타입이라, 재택근무와 코로나로 인해 집에만 있는 것이 견디기 어렵게 우울했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있거나 심한 날은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거나 했다. 일종의 고립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단순히 고립감이라고 칭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어떤 지독한 외로움이 있었다. 나는 그 외로움이 일종의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내 삶에 무언가 부족하고, 그것을 충족해야 한다는 강한 니즈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 부족한 그 '무엇'이 뭔지 알 수 없어서, 당시 어떻게든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처음에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모임에 나갔다. 러닝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매주 함께 달리면서 나의 외로움이 다소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모임이 끝나면 다시 외로워졌다.


그래서 애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솔로가 된지 일 년이 막 넘은 시점이었다.) 각종 데이팅 어플을 설치하고, 틴더에서 골드회원 결제까지 했다.



골드회원의 특혜로 수백 개의 Like를 받았음에도 내 취향인 이성은 없었고, 겨우 내 타입을 발견해서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을 받지 못했다. 외모만 보고 호감과 비호감을 결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더 외로워지고 말았다.




나의 내면을 바라보다

지금 생각해도 참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시도했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으니 해결책도 알 수가 없어서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틸 스완의 <외로움의 해부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외로움의 해부학>을 읽으며 처음으로 내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결핍은 외부의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책에서는 외로움의 원인을 분리, 두려움, 수치심의 세 가지로 분석한다. 이중 '수치심'이라는 항목이 특히 재미있었다. 말미잘은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이것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반응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의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자기 자신을 밀어내게 된다.


자기 자신을 밀어낸다는 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어린 시절에 사회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 중 일부를 거부하거나 끊어낸다. 예를 들어 분노라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이 가정에서는 아이가 화를 내면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아이는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고 부정한다.


이렇게 억누른 모습은 의식 속에서 희미해지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기 내면에 분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분노가 자신의 일부임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너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전혀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유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인에게는 본인이 억누른 그 모습이 명확하게 보인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다양한 내면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 내면에 다양한 자아가 있다는 것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들이 심각하게 분열될 상태이기 때문에 외로움이 발생한다. 쉽게 말해 내면의 여러 자아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끊어내고 거부했던 자신의 일부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받아들인다면, 즉 온전해진다면 외로움이 사라진다는 것이 틸 스완의 이야기였다. 물론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인데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수치심에 말미잘처럼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시의 아이가 자신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면, 처음 거부당했을 때 느꼈던 공포가 되살아나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섬세하고 의존적인 나를

인정해주다

나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즉시 나 자신에게 적용해보기로 했다. 책에서는 내면의 가장 통합하기 어려운 세 가지 자아를 이야기하며 만약 우리가 이 세 자아를 인식한다면,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이 연약한 측면을 공감하며 이해해주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한다면, 이들의 연결과 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수치스러운 자기(Shame Self): 수치심을 담당하는 인격체.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는 대상을 내면에서 독립적인 인격체로 형상화해 발전시킨 다음 세상에 내보이는 인격과 분리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감춘다.

연약한 자기(Vulnerable Self): 연약함을 담당하는 인격체.

보호자 자기(Protector Self): 바깥세상으로부터 나의 연약함을 보호해주는 대상을 담당하는 인격체.


평소 창의적으로 놀기를 좋아하는 친한 친구들과 모여서 워크숍처럼 진행했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준비해서 각자 자신의 수치스러운 자기, 연약한 자기, 보호자 자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이름을 붙이게 했다. 그리고 각각에 자기에 서사를 부여하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여러 자아를 설명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나의 경우에 내 안에 '모찌'라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했다. 모찌는 엄청나게 단순하고 엄청나게 긍정적이다. 또 '애비'라는 자아도 있는데, 애비는 단순한 모찌랑 다르게 섬세하고 의존적이고 헌신적이다. 애비는 나의 연약한 자기다.


나는 독립적일 때 더 안전하다고 느껴서 평소에 나의 연약한 자아인 애비를 억누르고 숨긴다. 그래서 나의 의존적인 모습은 친한 친구나 애인밖에 알지 못한다. 애비는 모찌가 좋지만, 제멋대로인 모찌랑만 놀면 섬세한 모습을 인정받지 못해서 우울했다. 그래서 애비에게 다정한 애인을 만들어줬다. 모찌도 애비가 행복해하니까 기뻐했다. 이렇게 다들 행복해졌다.


이렇게 쓰면 쌩뚱맞고 이상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방법은 실제로 먹혔다. 즉 이 워크숍 이후에 나의 외로움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동안 어떤 방법을 해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어리둥절해하며 나의 제안에 응해 함께 워크숍을 했던 친구들도 몇 주 뒤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실제로 덜 외롭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함께 코로나블루를 겪고 있었다.)


외로움이 줄어든 건 친구들끼리 내면 깊숙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안에 내가 계속해서 억눌러온 나의 연약한 모습, 그동안 부정해왔던 보습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인정해주려고 노력했던 것이 의미있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 이후 지금까지 큰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내면의 결핍을 제대로 직시하는 기회를 가졌고, 그것이 나의 결핍을 해결했다. 


나(가운데)와 친구들. 친구들아 고마워!




결핍이 있으면서

온전한 사람

나의 결핍을 사랑하는 게 항상 쉽지는 않다. 무능력한 나, 이기적인 나, 멍청한 나, 쉽게 화내는 나, 화내지 못하는 나.. 우리가 평소에 억누르고 부정하는 자아(Self)는 수도 없이 많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억누르기만 한다고 답은 아니다.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은 어쩌면 평생 도망다닐 수 있지만, 내부에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 순간 내 안에 특정한 나의 모습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직 후 '무능한 나'를 마주해야했던 지인처럼 말이다. 사실 누구나 내면에 '무능한 나'와 '유능한 나'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너무 완벽한 관계를 꿈꾸기 때문에 외롭다고 말한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어쩌면 타인과의 완벽한 관계는 실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작하는 지점에서 완벽하게 보였던 관계라도 이후 어느 시점이 되면 서로를 의심하고 밀어내게 된다. 하지만 최소한 나 자신의 내면에 여러 자아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는 있다.


한동안 코로나에 결린 사람을 사회에서 격리하고 죄인 취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사회적으로 성숙해지면서, 코로나에 걸린 사람도 그저 피해자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의도적으로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 안의 '수치스럽고 연약한 나'를 마치 코로나에 걸린 사람을 피하듯 밀어내고 피하는 대신, 발견해내서 위로해주고 치료해주면 어떨까.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면 결핍이 있는 사람과 온전한 사람은 모순되는 말이 아니다. 결핍이 있으면서 온전한 사람인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 자신의 결핍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매력적인 사람이다.



2021년에 쓴 글입니다. 낯컨으로 용기 얻어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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