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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May 25. 2024

라이프스타일 기획하기

일본 미야자키 여행 중 단상





2019년 크리스마스, 전 해와 다르게 나는 솔로였다. 한국에서 홀로 쓸쓸하게 보내기 싫어서 항공권 특가로 뜬 미야자키라는 처음 들어보는 일본 항구 도시로 혼자 여행을 갔다. 겨울인데도 따뜻하고, 작은 도시라 한적해서 평화로웠다.


미야자키에는 골목골목 귀여운 스몰샵이 많았는데 그중 THE ROSA COFFEE라는 곳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작은 핸드드립 전문 커피숍이었고 다양한 종류의 원두 중 선택할 수 있었다. 카페의 주인은 원두를 적당한 크기로 갈고, 물의 온도를 맞추거나 시간을 재는 등 섬세한 작업으로 손으로 원두에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려 주었다.


당시 나는 에디션덴마크라는 브랜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커피 맛에 대한 섬세한 인지가 막 가능해진 시기였다. 그때는 맛있는 커피가 너무 좋아서 핸드드립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남자와 미래에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오리지널 로스팅 원두를 4개나 구비해 둘 정도로 커피에 진심인 주인이 운영하는 카페를 만난 게 반가웠다.


오리지널 원두는 라이트, 미디엄, 헤비, 윈터 리미티드의 4가지 종류가 있었다. 라이트 로스팅과 미디엄 로스팅의 원두 이름은 각각 Sun Rise Blend, Sun Set Blend였는데 이렇게 감성적인 이름을 지은 것도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그중 Sun Set Blend 원두를 선택했다.




주인은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케맨이었다. 실제 외모도 멋있었지만 그 사람과 대화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는 자신의 원래 고향은 오카야마라는 곳으로, 미야자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미야자키에는 4년 전에 왔다고.


왜 왔냐고 물어보니 라이프스타일 때문이라며 서핑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하기 때문에 미야자키에 와서 커피숍을 열었다고 말했다. 미야자키는 일 년 내내 따뜻하고, 바다도 바로 옆이라 서핑을 하기 좋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일엔 카페 운영을 하고 주말에는 서핑을 간다고 말했다.


그때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당시 나는 <라이프스타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며 모든 브랜드는 결과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스타트업에서 백날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한다고 이야기해도 한국의 획일적인 삶의 방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는 것이 사실상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서울에 살며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었고 그 외의 삶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사는 도시를 옮기고, 주말이면 서핑을 가고, 좋아하는 커피로 사업을 시작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게 진짜 라이프스타일이구나> 생각했다.




몇 년 전 시드니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놀러 왔을 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서울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때?" 그러면서 시드니에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5시까지 회사 근무를 하고, 퇴근 후에는 집 근처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면서 칵테일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또 때때로 근교로 친구나 애인들과 여행을 간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서울의 라이프스타일이 뭔지 답할 수 없어서 아쉽고 부끄러웠다. 나에게는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고, 회식이 있으면 술을 마시고, 아니면 집에 와서 유튜브를 보는 일상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서울은 라이프스타일이 빈약한 도시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생각이 변했다. 그때는 단지 내가 서울에서 어떻게 나의 방식대로 살 수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서울에는 한강이나 서울숲도 있고, 지역마다 특색도 강하고(성수/홍대/압구정 등), 새로운 팝업 스토어도 많이 열리고,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고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코로나를 겪으면서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고 이전에 비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등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2022년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상의 많은 부분이 변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주 3회 요가를 간다거나.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만들고, 오프라인 밋업을 주최하거나, 재밌는 이벤트나 모임에 참여한다거나. 나만의 단골 가게, 마음이 편해지는 비밀 장소를 만든다거나.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장소―이렇게 세 가지를 갖추고 있다면 미야자키든 시드니든 서울이든 현재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단지 용기가 필요한 것뿐이라고. 오카야마에서 미야자키로 이사하고, 작은 커피숍을 행복하게 운영하고 있는 낯선 사람이 내게 처음 알려주었던 것이다.






찾아보니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더 로사 커피 인스타그램 @rosacoffee2015

더 로사 커피 웹사이트 https://www.rosa-coff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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