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JOURNE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개연성 Apr 08. 2017

친절함에 대한 단상

일본, 오키나와


오키나와에서의 여행 마지막 날, 여행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생각하다 슈리성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기로 했다. 슈리성은 류쿠 왕국(일본 본토가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전에 있었던 왕국)의 왕성으로, 중국과 일본의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건축양식, 낮은 성벽에 둘러싸인 성이 풍기는 신비로우면서도 개방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렇지만 며칠 전 친구와 함께 갔을 때는 성 관람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놓쳐 외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엔 성의 내부를 보자'하는 생각으로, 직장인인 친구가 일 때문에 먼저 한국에 갔기 때문에 혼자 슈리성에 갔다.


슈리성 관람이 끝나고 공항을 가는 길,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비를 피해 길가에 보이는 아무 작은 카페에 들어갔는데 인상 좋은 나이 든 여주인이 있는 카페였고 손님은 나 혼자였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배가 고팠기에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식사가 가능한지 물어봤다. 주인은 서툰 영어로 함바그와 있는 일본식 정식이 가능한데, 정식과 디저트, 커피는 1500엔이고, 정식만은 1200엔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주인의 앞에서 지갑을 털어 전재산을 보여주었다. 950엔. 아, 안돼.


"그러면 토스트랑 커피도 가능해요. 그건 600엔."

"아, 그러면 그걸로 주세요."

(실제로는 서툰 영어와 일본어로 이루어진 대화를 각색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정식을 가져다줬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900엔만 달라며 "서비스"라고 웃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정말 밥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함바그는 무척 맛있었고, 일본 가정식으로 이루어진 반찬과 밥이 정갈했다. 다 먹고 나자 주인이 놀랍게도 디저트와 커피도 가져다줬다. 다른 얘기지만, 오키나와에는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 커피가 없는 모양으로,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커피숍에 들어가도 싸구려 기계로 내린 단맛이 나는 커피를 주었다. 한국에서 하루에 한 잔씩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나로서는 (거의 커피중독)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실 수 없으니 내심 슬펐다. 그런데 그 주인이 가져온 커피는 제대로 된 '진짜' 아메리카노로, 내가 오키나와에서 먹은 커피 중 가장 맛있는 커피였고, 난 연신 아리가또라고 말하며 조금도 남기지 않고 즐겁게 다 먹었다.


주인은 중간중간 한국인이 와서 쓰고 간 메모를 보여주며 한국어로 쓰인 메모의 내용을 궁금해했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이 왔다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메모의 내용을 구글 번역기로 번역해주었는데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맛있게 먹고 갑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단골이 될 것 같아요"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카페의 여기저기서 감사한 마음이 오간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내가 밥을 먹는 지금 이 순간이 그 흔적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계산을 하려고 하자 그녀가 자신의 PC로 번역한 글을 보여주었다. 내용이 압권이었는데, '한국이 하루빨리 정치가 평화 안정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식사비를 지불 교통비가 있나요'라는 글. 나는 한국의 정치를 위해 기도하는 그녀가 신기해서 웃었다(박근혜가 탄핵된 직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밥을 먹는 데에 돈을 다 써버려 교통비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무척 감동했다. 그녀는 정말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공항으로 가는 길, 언제나 "똑똑한 사람보다 친절한 사람이 더 필요해"라고 말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자연스럽게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한 번은 김밥을 들고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혀 떨어뜨렸는데, 부딪힌 사람이 괜찮다는데도 기어코 김밥을 다시 사준 적 있다. 얼마 안 하는 거였지만 그래도 놀라고 감동했다. 대부분 "아이쿠 죄송합니다"하고 가던 길을 바삐 가버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번은 우산이 없어 버스에 내려 뛰는데, 어떤 여성분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때도 멀리서 보고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기 위해 달려온 그녀의 친절에 놀라고 기뻤다.


전혀 모르는 타인을 향한 친절은 종종 매우 신비하게 느껴진다. 김현경 선생님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무조건적인 환대가 공동체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런 친절은 분명 내가 사회에 속한 인간이라고 느끼며 행복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친구의 말에 뒤늦게 동의하며, 친절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친절함이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난 옛날부터 친절함은 분명 재능이라고 생각해 왔다. 별 것 아니지만 본인뿐 아니라 남들도 기쁘게 하므로.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므로. 오키나와의 작은 카페에서 경험한 그 친절이 나의 여행의 마무리를 멋지게 장식하였듯이. 나도 그런 여유와 위트와 다정함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호구같이 착한 것은 친절함이 아니며, 친절과 착함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절함은 보다 단호하고도 사려 깊은 마음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낙관주의자가 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