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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Apr 30. 2017

집 밖에서 찾은 미니멀 라이프



게스트 하우스에 가다


2015년 11월의 일이다. 뉴질랜드에서 보낼 시간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 통장 잔고를 무심코 봤다가 '헉'소리가 났다. 당장 굶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달 동안의 생활비, 식비, 여가비를 부담하기엔 통장 잔고가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돈을 흥청망청 썼는지를 반성하는 것도 잠시, 어떻게 해야 이 돈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러니까 가장 적으로도 남은 한 달 동안 가장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생활비, 특히 거주비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11개월 동안 지낸 오클랜드 대학의 기숙사는 무척 쾌적한 데다 친한 친구들도 많이 살고, 무엇보다 너무나 익숙해져 거의 내 집처럼 느껴지는 훌륭한 거주지였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1주 생활비가 한국 돈으로 약 20만 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코딱지만 한 기숙사 방하나가 1 달이면 그러니까, 80만 원이었다. 물론 오클랜드의 물가를 비교해볼 때 결코 비싼 것은 아니었다. (오클랜드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집값이 비싼 도시다. 평균 집값이 런던보다 비싸다. 출처: 2016년 포춘) 하지만 그 돈을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여행이라던지. 하지만 여행은 돈이 훨씬 많이 들지 않을까?


마침 친구가 X-helpers라고 일손이 필요한 곳에 호스트와 헬퍼를 연결해주는 웹사이트를 알려줬다. 호스트는 하루 4시간 노동의 대가로 일꾼들에게 식사와 잠잘 곳을 제공해야 한다. 친구가 알려준 그 사이트가 생활비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되도록 오클랜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 그리고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투랑기의 게스트하우스, The Lazy Dog Backpackers(이후 레이지 도그)였다.



레이지 도그는 이름 그대로 엄청 지루해 보이는 커다란 개가 상징인 촌구석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촌구석이라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매일 몇 명씩 꾸준히 방문했다. 통가리로 국립공원 때문이었다. 뉴질랜드는 탐험할 가치가 있는 멋진 자연경관이 많이 있는데 통가리로 국립공원도 그중 하나로, 특히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은 세계 3대 크로싱으로 들 만큼 유명한 하이킹 코스다. 해마다 몇 천 명의 관광객들이 하이킹을 하러 오는데 경유 과정에서 잠시 머무르는 도시가 투랑기였다.


이 글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일꾼으로 일하며 내가 배운 것으로 인하여 어떻게 미니멀 라이프에 한 발짝 더 다가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담  : 출발 전, 오클랜드에서


내가 기숙사의 몇몇 가까운 친구들에게 "떠날 거야"라고 하자 친구들이 놀라며 "어디로?"라고 했다. "투랑기"라고 말하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네 멋대로 살아라.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갑작스럽게 떠난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다, 뉴질랜드에 약 일 년 동안 살면서 나는 어느새 언제든지 마음을 먹으면 혼자 훌쩍 떠날 수 있는 프로-여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대단하다고 자부하는 것은 짐 싸는 능력인데, 필요한 것을 꼼꼼하게 잘 챙겨서가 아니라, 그 스피드 때문이다. 10분. 딱 10분이면 다 쌀 수 있다. 그만큼 필요한 것이 적다. 처음에는 며칠간이고 짐을 싸서 잔뜩 들고 갔던 때가 있으나,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로 꼭 필요한 것만을 챙기고 점점 간소하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물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 풀메이크업 이라던지. 그것들을 다 챙기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짐을 간소하게 싸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연스럽게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게 된 것 같다.


기숙사에서 방을 뺄 때도 짐을 금세 다 쌌다. 냄비, 접시 등의 요리 도구나 빨래 바구니, 세제 등의 세탁용품, 기타 생활할 때 필요한 것들은 다 친구들에게 주고, 옷이나 화장품, 책 등 개인 소지품은 캐리어에 넣어 친구 방에 맡겨두었다. 남는 것들은 버렸다. 그리고 백팩 하나 메고 투랑기로 향했다. 정든 기숙사여 안녕!



게스트 하우스에서 알게 된 것 1

내게 맞는 삶의 방식


여유로운 오후의 레이지도그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 말고도 세 명의 일꾼이 이미 있었던 데다가 (셋 다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영어를 못했지만 무척 유쾌했다. 우리는 시간이 나면 시내로 피시앤칩스를 먹으러 가거나 Outkast의 Hey ya!에 맞춰 춤을 추었다.) 하루 4시간의 노동도 어렵지 않고, 보통 2시면 끝났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였다.


나는 그곳에서의 생활이 무척 행복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상 단순한 일과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현대인은 수많은 약속과 모임에 치여 매일매일 전쟁터같이 산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지만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 일주일에 세 번은 헬스, 두 번은 학원, 한 번은 동아리 회의, 내일은 친구랑 점심 이런 식으로 계획 혹은 약속이 끝없이 있었다. 다이어리의 달력에는 일정으로 빼곡했고, 그 일정들을 보며 만족감을 느꼈지만 때론 지치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조금이라도 한가로우면 불안해 서둘러 계획을 세우고 약속을 잡았다. 끊임없이 더, 더 열심히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투랑기에서의 하루 일과는 언제나 매우 단조롭고 여유로우며 무엇보다 매일이 똑같았다. (글의 마지막에 일과표를 첨부함) 그건 작은 동네인 탓이 컸다. 갈 수 있는 장소가 제한되어 있었고, 자유시간에는 기껏해야 근처의 강이나 산으로 산책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아침은 늘 동네에 단 하나뿐인 베이커리에 가서 사야 했는데 아침 일찍 문 여는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다.


지루하지는 않았냐고?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그리하여 나는 장소에 지루함을 잘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신촌만 해도, 어릴 때부터 집이 서대문구인 데다가 학교가 신촌 근처라 거의 5년 동안 혹은 훨씬 전부터 매일같이 신촌에 갔는데, 한 번도 지겹다고 생각한 적 없다. 반면 어떤 친구들은 신촌이 지겹다고 손사래를 친다. 레이지 도그에서도 "이 동네는 너무 작아. 어서 다른 호스트를 찾아야겠어"라며 지겨움을 토로하는 일꾼들이 있었다. 신촌을 지겨워하던 친구들, 그리고 작은 마을에 불평하던 일꾼들은 분명 대도시에서 사는 것이 체질에 맞는 '본투비 코스모폴리탄(Born to be Cosmopolitan)'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쉽게도 '본투비 코스모폴리탄'은 아니었다. 서울 같은 큰 도시보다 오클랜드나 투랑기같은 작은 도시에서 더 만족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Lazy Dog와 Nicolas


한편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은 무척 즐거웠다. 새로운 사람에게는 새로운 스토리가 있고,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다 해도 모든 스토리는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결혼할 여자 친구와 무려 이 년 동안 여행을 하는 중인 독일 남성도 있었고,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무작정 워킹홀리데이를 온 삼십 대 일본 여성도 있었다. 또 프랑스 일꾼 중 한 명은 만화 작가였는데, 그의 만화를 보여줬는데 전부 불어라 읽진 못했다. 하지만 아름다웠으며 심오한 만화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통가리로 크로싱을 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지만(나도 두 번이나 했다), 목적도 이유도 제각각이었으며, 각자의 추억을 갖고 그곳을 떠났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알게 된 것 2

소유의 역설


게스트하우스로 가져간 티셔츠 세 개

어느 날은 매일처럼 빨래를 하다가, 문득 옷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나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옷을 정말 좋아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은 언제나 쇼핑을 할 정도다. 그렇게 옷을 좋아하는 나지만 투랑기에 올 때는 무조건 편한 옷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장 단순한 티셔츠 세 개, 가장 편한 바지 두 개, 추울 때 입을 수 있는 후드 집업만 가져왔다. 그런데 그런 옷차림이, 언제나 헐렁한 반팔티에 짧은 바지 혹은 편한 운동용 레깅스를 입은 차림이, 나에게 너무나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옷이 부족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사실은 내가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이다. 더 예쁘고 세련된 옷을 사야겠다는 평소의 생각이 그곳에서는 거짓말처럼 나와 동떨어진 얘기로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쇼핑을 좋아하지만, 그 이후 정말 많은 옷을 미련 없이 버리거나 더 잘 어울리는 친구에게 줬다. 지금 나의 옷장에는 내게 정말 어울리는 또 내가 좋아하는 옷만 남아있다. 미니멀 라이프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가지려는 태도를 버리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 필요한 것만 가지는 것. 그것이 라이프 스타일이든, 옷이든, 어떤 것이든 말이다. 중요한 것은 투랑기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미니멀 라이프에 대해 내 생각을 좀 더 이야기하자면, 요즘 '집에서 이것저것 불필요한 것을 버려라'라는 식이 유행인 것 같지만, 실은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부딪쳐보고 난 뒤에야 무엇이 내게 소중한 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늘 붙들고 있었는데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건 나처럼 멍청한 사람의 경우에 한해서 일지도 모른다. 똑똑한 사람들은 굳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뭔지 추려낼 수 있으려나?)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집 밖은 어디까지나 집이 있기에 의미 있기 마련이다. 내게 그런 느낌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코 찾아왔다.



여담 : 출발 전, 투랑기에서



투랑기는, 뉴질랜드의 어디에서도 그렇듯이, 밤이면 별이 무척 많이 보인다. 정말 아름답다. 레이지 도그에서 이 주쯤 됐을 때 조명 하나 없이 깜깜한 도시를 별을 보며 걷다가 문득 집이 생각났다. 오클랜드 기숙사의 내 방, 그리고 날마다 나와 놀자고 방을 노크하던 친구들. 향수병으로 외롭고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이제 곧 돌아갈 내 나라 한국. 가족이 있는 집이 그리웠다. 2015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오클랜드에 돌아가 기숙사에서 2주 더 머물렀다.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버려 방은 거의 텅 비다시피 했고 갖고 있는 것은 훨씬 적었지만 더, 어쩌면 그 해 가장, 충만하게 보냈다.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생각난다. 모든 불필요한 것을 버린다 해도 그들은 남을 것이다. 분명 조금 더 심플해지고 조금 더 단단해져,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집으로 간다.







추신. 투랑기에서 나의 하루 일과


6:00 AM 기상


6:15 AM 아침을 사러 감

레이지 도그에서 약 20분 걸으면 시내다. 사실은 시내라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 작다. 아무튼 그 동네 유일의 베이커리는 매일 아침 5시에 문을 열었고 6시에 가면 따끈따끈한 빵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늘 바게트를 샀고, 버터를 발라 아침으로 먹었다.


10:00 AM 일 시작

이때쯤이면 여행객들은 전부 나가고 없다. 가장 먼저 침대 시트를 간다.


10:30 AM 청소


1:00 PM 빨래

하루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거둬낸 전날의 시트를 모두 큰 세탁기에 넣고 돌리고, 세탁이 끝나면 바깥의 빨랫줄에 건다. 12월인 뉴질랜드는 이미 여름이었고(남반구는 계절이 북반구와 반대임), 때때로 비가 왔지만 대체로 날씨가 매우 좋았다. 햇빛 아래서 바람에 나부끼는, 좋은 냄새가 나는 침대 시트를 보며 평화로움을 느꼈다.


2:00 PM 자유시간 시작

어떤 날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하며 손님을 받았다. 날씨가 좋은 날은 무작정 걷기로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산책을 갔다. 조금만 걸으면 강과 낚시꾼이 있었고 산책 코스가 있는 작은 산도 있었다. 시내에서 과일이나 저녁으로 먹을 식료품을 사기도 했다.


8:00 PM 하루의 마무리

게스트하우스 사장(그는 대머리의 건장한 중년 남성으로 모두를 공평하고 친근하게 대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주 괴짜였다. 개Lazy Dog를 아주 사랑했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 크로싱을 갔다 온 사람, 다음 날 크로싱을 갈 사람이 모두 모이는 시간이었다. 몇몇은 저녁을 먹으면서 말을 걸거나 대화를 하기도 했다. ("오늘 크로싱은 어땠어요?"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무척 피곤하네요.") 그러다 친해지면 맥주를 마시거나 카드게임을 했다.

 

10:00 PM 취침

적당히 노곤하며 평화로운 상태로 잠이 들었다. 다가올 내일에 어떤 기대도 불안도 없었다. 단조로운 하루, 하지만 분명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어쩌면 새로운 장소를 산책할 하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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