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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Jun 18. 2017

촌스러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번 학기에는 주말 저녁마다 마카롱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했다. 요즘 번화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에 900원짜리 마카롱을 파는 곳이었는데, 일이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디저트를 좋아하는 나는 그토록 다양하고 많은 마카롱을 매주 볼 수 있어 즐거웠다. 딸기, 초코, 바닐라, 민트, 블루베리, 망고, 치즈, 모카, 녹차……. 기억나는 것만 그 정도인데 실제로는 훨씬 다양한 맛이 있었고 들어오는 마카롱의 종류도 매주 바뀌었다. 아직도 컬러풀한 마카롱들이 유리관 너머로 진열되어 있던 것을 상상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건 미각적으로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만족감을 주는 광경이었다.



모든 아르바이트가 그렇듯이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패턴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어떤 맛이 가장 인기가 좋은지, 커플이 오면 누가 돈을 내는지, 친구들끼리 오면 어떤 사람이 대표로 맛을 고르는지 따위의 것 말이다. 그중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발견은 사람들의 비슷비슷한 ‘스타일’이었다. 마카롱을 파는 곳이다 보니 손님은 여성, 특히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는 여성이 많았다. 그들의 스타일은 대부분 세련되었거나 최신 유행의 것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프로듀스101>의 옷 스타일, 즉 흰색 혹은 분홍색의 테니스 스커트, 크롭티, 오프숄더 블라우스, 에뛰드 하우스 풍의 발랄하면서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는 메이크업 같은 것을 수도 없이 봤다. 최신 유행에 따르지 않는 이들의 복장이라고 할지라도 단정한 색감의 체크 셔츠나 루즈핏의 티셔츠, 슬랙스, 스키니진처럼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에서 벗어난 것은 없었다. 문득 궁금했다. 촌스러운 옷을 입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대한민국에 언제부터 옷 잘 입는 사람들만 있었나? 물론 손님 중엔 촌스러운 옷을 입은 이들도 종종 있었는데, 그들은……십중팔구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촌스러움” 지적하는 사회


촌스러움은 사람이나 물건의 외양을 묘사할 때에 쓰이는 수식어이다. ‘촌’ 스럽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도회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어쩐지 시대가 지난 것 같은 구식의 느낌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촌스럽다”는 것 역시 지극히 주관적인 미의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즉, 나에게 예쁜 것이 남에게 예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 촌스럽지 않다고 남이 보기에도 촌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처럼 사람마다 미적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첫 장면에서 저널리스트의 꿈을 안고 뉴욕에 상경한 앤드리아는 자신을 받아주는 신문사가 없어 어쩌다 보니 패션지의 어시스턴트로 지원하게 된다. 그녀의 면접을 보기로 되어있던 에밀리는 앤드리아를 보자마자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도저히 그녀의 촌스러운 옷차림을 봐주지 못하겠다는 듯이. “인사과도 완전 포기했나 보네.” 물론 다음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앤드리아도 마냥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앤드리아, 런웨이는 패션 매거진이야. 패션 감각 없인 힘들다고. (에밀리)
제 감각이 어때서요? (앤드리아)


하지만 그 후 잡지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앤드리아를 보고 첫눈에 얼굴을 찡그리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녀에게 업무를 내리는 편집장 미란다가 그녀의 평범한 구두를 빤히 쳐다보다 “나가 봐.”라고 했을 때 결국 앤드리아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원래 신던 신발을 벗어던지고 명품 하이힐로 바꿔 신는다. “제 감각이 어때서요?”라며 당당했던 그녀의 자신감은 그렇게 며칠 만에 무너져 내렸다.


"얜 누구야?" "걔? 말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보기엔 지극히 괜찮아 보이건만 앤드리아의 패션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촌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런웨이는 패션 매거진이었다. 패션 매거진에서 일하려면 특정한 패션 감각이 요구되고 필요할지도 모른다. 만약 앤드리아가 신문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면 그녀의 패션에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도, 스타일을 바꿀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패션 매거진도 아닌데 ‘본인의 기준에서’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패션 감각 지적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본인의 기준에서’ 촌스러운 것이라고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적 감각은 개인마다 또 사회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자 연예인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외국에서 한창 유행하는 패션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스틴 비버의 바지 내려 입기처럼) 미적 감각에 있는 한 절대적으로 예쁘다거나 촌스럽다거나 하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몇 년마다 유행이 도는 패션에서는! 그런데 한국에서 ‘패션 취존’이 진정 가능한가?


언젠가 ‘패션 고자’에 대한 인터넷 유머 글을 봤다. 한 커뮤니티에서 ‘패션 고자’가 “내일 썸녀랑 약속 있는데 옷 괜찮은지 봐주세요”라며 자신의 옷을 찍어 올리자 댓글로 사람들이 극구 말린다. “이건 아니에요.” “그냥 나가지 마세요.” 글쓴이에게 이것저것 조언해 주기도 한다. “셔츠는 빼서 입는 게 어때요?” “바지를 버리라고!”, “제발 바지통 좀 좁은 거 입어요 그리고 접어 입지 좀 마요 제발요”. 옷을 바꿔 입을 때마다 ‘패션 고자’의 감각과 스타일에 매번 경악하는 댓글러들은 결국 글쓴이가 그들의 맘에 들 정도로 무난한 옷차림이 되어야 비로소 데이트를 허락(?)한다. 모두가 힘을 합쳐 한 사람의 썸녀와의 관계를 구한 눈물겨운 사례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어쩐지 씁쓸하다. 한국 사회에서 옷을 못 입는 사람은 이처럼 쉽게 조롱거리 혹은 오지랖의 대상이 된다.


화제가 됐던 '레전드 패션고자' (출저:오유)

세상에는 지극히 다양한 기호와 취향이 있는 것처럼 패션에 대한 감각도 ‘당연히’ 다양하다. 누군가 보기에 촌스러운 그 옷을 당사자는 맘에 들기 때문에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취향은 자연스럽게 무시된다. 타인의 촌스러움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자들의 지적은 상대방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타인의 취향을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길거리에서 남 옷 입은 것 보고 수군거리는 것, 친구나 가족의 옷차림을 보고 “그렇게 나갈 거면 차라리 나가지 마”라고 말하는 것 모두 같다. 슬픈 것은 내 패션에 대한 지적이 반복되면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기보다는 남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옷을 입을 입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 옷차림이나 감수성에 대한 지적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에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나 신발을 벗어던진 앤드리아의 마음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취향은 언제 거기에 있었냐는 듯이 잊히게 된다.


촌스러움이 사라진 유행의 나라, 한국


남들에게 지적받지 않는 동시에 감각 있다고 여겨지기 가장 쉬운 방법은 유행을 따르는 것이다. 유행은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소비사회에 관해 이야기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특징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 재교육(recyclage, 르시클라주)을 이야기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인은 사회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세상의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해야 할 것을 강요받는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재교육’은 교육의 개념이 아니라 “시대에 부응한다는 것, 급변하는 시대의 최신 유행에 부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대인들은 수시로 복장과 사물을 바꿀 의무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현대 소비사회의 진정한 시민이 되지 못한다.


이런 소비사회의 특징은 한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다. 한국은 ‘유행의 나라’다. 우리의 삶에서 유행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행은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매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틴 프로스트 전 파리 7대 한국어학과 교수는 한국에 관한 그녀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70년대 말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당시 여성에게 있어서 두 가지 큰 유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추 머리’와 에어로빅이었다. 어느 날 재래시장에 나가보니 갑자기 시장 아주머니들이 모두 같은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모든 아주머니의 머리 모양이 둥글둥글 양처럼 보여 갑자기 이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머리카락 길이나 둥글둥글하게 말린 곱슬머리 모양이 모두 다 비슷해서 마치 그들이 똑같은 미용실에 다녀온 것 같았다.……(중략)……누군가 좋다면서 해보라고 하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먼저 해보는 것이 한국식인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서 한때 에어로빅이 유행했고 요즘은 요가, 필라테스, 걷기 운동이 유행이다.” (한국일보 ‘오피니언: [한국에 살며] 한국은 유행의 나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남을 따라 하는 것이 한국식인지에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유행에 따라 사람들의 스타일이 일관되게 변하는 것은 70년대 말에도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70년대 말에 그것이 ‘배추 머리’였다면 10년 전에는 노스페이스 패딩이었고, 지금은 테니스 스커트와 오프숄더 블라우스인 것이 다를 뿐이다.


북극의 졸업식
홍대를 강타한 모나미 패션
수업에 새로 산 청자켓 입고 갔는데
학교에 새로 산 스트라이프티 입고 갔는데

이 중에는 본인이 좋아서 그 옷을 사 입은 사람도 있겠지만 단지 유행하기 때문에, 남들이 입기 때문에 그 옷을 사 입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직후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당시 유행하는 옷 스타일을 검색해서 사고 유행하는 메이크업을 열심히 연습해서 하고 다니던 기억, 여자라면 아마 있을 것이다. 원래부터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일이었겠지만 별로 관심 없던 사람에게는 고역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나의 지인 B는 독특한 미적 기준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들이 “예쁘다”는 사람을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대로 그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에서는 예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예쁜 것과 못생긴 것에 대한 구분도 잘하지 못하던 B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본인의 미적 기준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자신이 고른 옷마다 촌스럽다고 지적하는 친구들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내가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겨우 남들과 같은 눈을 갖게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다른 사람과 함께 쇼핑하는 것이 익숙하지 못하다. 자신이 고른 옷이 “촌스럽다”는 핀잔을 들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나는 B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늘 무난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든, B처럼 훈련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든, 한국의 거리에는 유행하는, 무난한, 비슷비슷한, 세련된 스타일의 사람들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좋아 보일 수 있는 광경이 나에겐 어쩐지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 ‘촌스러움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는 유행만이 만연하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존재할 권리


나는 촌스러운 사람들이 그립다. 우선 지극히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다. 진정한 패셔니스타는 자신만의 뚜렷한 패션 철학을 가지고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는 법이다. 지드래곤이나 공효진을 생각하면 쉽다. 종종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패션을 선보이지만 그런 것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도 하고,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패션을 ‘재미있는’ 것으로 만든다. 지금처럼 무난하고 적당히 세련된 옷차림이 대부분인 사회, 개개인의 패션 철학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패셔니스타가 나오기 어렵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지 않은가.


패션 철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모더니즘 패션의 선구자이자 명품 브랜드의 창시자로 유명한 샤넬은 자신만의 철학이 아주 뚜렷했다. 그녀는 코르셋을 입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수많은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켰고, 최초로 여성을 위한 수트를 선보였으며, 그전까지 장례식을 위한 색, 칙칙한 색이었던 블랙을 ‘섹시한’ 일상복의 영역으로 과감히 끌어들였다. 그녀가 유행시킨 옷은 수도 없이 많으나 그녀의 패션 철학은 달라진 적 없다. 화려함이 아닌 심플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무엇보다 편하고 실용적일 것. 지금에서야 그런 철학이 지극히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귀부인이라면 최대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차림을 추구했던 당시에 샤넬이 선보인 패션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일관된 패션 철학은 결국 여성 해방까지 이루어냈다.


샤넬은 여성도 남성처럼 '비즈니스 자리에 입고 갈 수 있는'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고유한 패션 철학을 지키기 위해서 ‘패션 취존’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설사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패션 감각도 미적 감각에 다름 아니라 누구는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하고 누구는 다른 사람들보다 둔감한 것이 당연하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노래를 잘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훈련을 통해 나아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므로 애초에 관심도 없고 잘하지도 못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관심 있고 잘하는 것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것 같다. 얼굴도 예뻐야 하고, 옷도 잘 입어야 하고, 사회성도 좋아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되고……. 기준에서 평균에 못 미치면 무시당하기 일쑤다. “옷 잘 입는 사람이 많은 게 왜 안 좋아? 아무튼 옷 잘 입는 건 좋은 것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이상의 지나친 추구는 차별을 낳는다. 외모지상주의가 왜 나쁜가. 예쁘고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김태희가 아니고 송중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외모를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촌스럽게 옷 입는다고 사람들이 수군대고 대놓고 모멸감을 주는 사회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사실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건 외모나 패션 따위가 아닌데도 말이다.


외국으로 나갈 때마다 나는 사람들의 프리 한 옷차림에 놀란다. 정말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저런 걸 돈 주고 샀단 말이야?”라고 생각할법한 후줄근한 옷들을 당당히 입고 다닌다. 여성들의 노브라 차림도 흔하다. 반대로 외국인들은 한국에 오면 사람들이 너무 잘 꾸민 것에 놀란다. 나의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인들은 다 스타일도 좋고 화장도 너무 잘한다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외국이 더 부럽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옷차림이나 외모 때문에 지적을 받거나 그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낀 적은 없을 것이다. 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미적 철학을 형성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너무 높은 사회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느라 남몰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패션 철학은 개개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프랑스에 프렌치 시크가, 일본에 개성 강한 스트릿 패션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패션 철학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유행과 오지랖?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스타일 철학을 바꿀 때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마카롱집 알바생의 경험담을 말하자면, 여러 맛 중에서도 초코, 바닐라, 딸기가 가장 인기가 많다. 반면 치즈, 망고, 민트는 인기가 없어서 하루에 몇 개 팔릴까 말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코, 바닐라, 딸기를 제외한 다른 맛을 없애 버린다면, 첫째로 다양한 색깔과 맛의 마카롱이 전시된 것을 보면서 느꼈던 시각적인 만족감이 사라질 것이고, 둘째로 나처럼 치즈 맛 마카롱을 좋아하는 사람이 괴로울 것이다. 마카롱 맛도 이렇게 다양해진 세상인데 왜 한국은 아직 한 가지의 취향을 고집할까. 소수의 세련된 이미지와 다수의 그로 인한 차별로 굴러가는 대한민국 사회는 언제쯤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게 될까.




이 글은 2016년 9월 1boon에 소개되었습니다.
https://1boon.kakao.com/misfits/fashion_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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