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근시 사회>,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책 <근시 사회>와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를 보며 북미의 사회 문제를 한국이 그대로 닮아 있는 것에 놀랐다. '헬조선'만의 문제인 줄 알았던 병폐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같이 겪고 있다는 것은 위안이기도 하고, 더욱 암울하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것은, <근시사회>나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신랄하고 통찰력 있는 이들이 먼저 나서서 "이것이 문제다" 그리고 "문제가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근시사회) & 이런 마음가짐으로(다음 침공은 어디?)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니 마치 상처가 난 부분을 -안 그래도 아픈 곳을- 쿡쿡 쑤시다 못해 푹 찔렸지만 되려 통쾌함, 짜릿함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특히 북미 특유의 유쾌한 신랄함과 풍자가 돋보이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를 정말 재밌게 봤다. 핀란드의 교육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참 눈물이 나서, 웃다가 울다가 하느라 힘들었다. 핀란드에서 "행복을 찾는 교육"을 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행복을 빼앗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영상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어린 시절을,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법 대신 타인과의 끝없는 경쟁과 자기혐오 속에서 작은 가능성마저 짓밟히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마이클 무어가 "Hammer-and-Chisel"을 이야기할 때 아! 하고 생각했다. 마이클 무어는 친구와 재미로 베를린 장벽에 못을 대고 망치질을 하였더니, 어느 날 갑자기 벽에 구멍이 나고 무너지는 것을 본 경험을 통해 "엄청난 낙관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속 망치질을 해서 금을 가게 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무엇이 먼저일까? 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낙관주의자들이 생긴 걸까, 낙관주의자들이 벽을 무너뜨린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애초에 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망치질을 시작하지 않았을 거고, 그렇게 몇몇 이들이 모여 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며 또 다른 낙관주의자들이 생기고, 그들이 또 모여 벽에 금을 가게 하고. 이런 것을 '선순환'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다음 침공은 어디?’가 마이클 무어의 전작과 다른 느낌의 영화라면, 그건 그가 미국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여행을 기획했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이 끝나고. 나 역시 우리 사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도, 나부터 못 말리는 낙관주의자("crazy optimist")가 되어 벽에 금을 가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 낙관주의가 언제나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쓸쓸히 퇴장해야 할지도 모른다. 현실의 높은 벽은 비정하고 견고해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가 해고되고 나서 이상하게 개운해 보이는 것처럼 싸워보지도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아니면, 지나친 낙관주의인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