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일까? 지난 약 6년 동안 나는 너무 힘들었다. 처음에는 사랑이 잘 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내 주위 사람들이, 내가 처한 환경이 나와 맞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나는 잘 살고 있었다. 내 주위 사람들은 똑똑하고 다정했고, 내가 처한 환경은 객관적으로 좋았다. 좋은 대학을 나왔고,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적성에 맞는 직업이었다. 건강한 신체에, 지능과 외모도 나쁘지 않고, 친구도 많고, 가족 관계도 무난하고. 뭐, 연애는 작년까지 잘 안 풀렸던 건 사실이지만.
내면이 너무 불안하고 힘든 날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나는 명리학, 점성술, 타로, 휴먼디자인 등을 공부했다. 매일 명상을 하고 일기를 썼다. 그러면 조금 마음이 괜찮아졌다. 그렇게 5년 정도 지난 작년 아직 추운 3월 초 어느 날, 나는 근처 요가원에서 사주팔자를 봤다. 30대의 젊은 선생님이 하는 곳이었다(여기는 아직도 요가를 하러 주 2회 이상 다니고 있다). 상담에서, 선생님은 몇 년 동안 계속되던 힘든 시기가 내년이면 끝난다고 했다. 힘든 시기는 2019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그때부터였지, 내가 이렇게 필사적이게 됐던 게. 나는 “참 길었네요”라고 말했다. 눈물이 났다-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생각보다 힘들었으며, 이 힘듦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믿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난다는 말을 들으니까 너무 안도해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그때 마침 박상영의 <믿음에 대하여>라는 소설집을 읽고 있었다. (최근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인 <대도시의 사랑법>이 영화로 각색되어 개봉했다.) 그 소설에도 나처럼 ‘눈물이 나야지 슬픈지 아는 사람’이 나온다. 동거하는 애인 비슷한 관계였던 Y의 장례식에 간 주인공은, 장례식에 가서 다른 우는 사람에게 냅킨을 건넬 정도로 덤덤했는데, 유자차를 마시면서 눈물이 나서 자신이 생각보다 Y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울고 있는 남자에게 냅킨을 건네고
유자차를 마셨다.
시판용 유자청을 너무 많이 넣어 지나치게 달고
여전히 뜨거운 유자차를 홀짝이다 보니
이상하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그제야 나 역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소리 내 울면서
나는 생각보다 Y를 좋아했으며,
Y와의 관계가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Y의 뒷모습과
설거지를 마친 그릇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고춧가루 같은 평온한 미래를
내내 그려왔다는 사실도.
좀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내가,
오롯이 현재는 살아왔던 내가
나도 모르는 새 감히 ‘영원’이라는 꿈을 품어왔다니.
그런 내가 너무 불경하고 한심해 또 웃음이 나왔다.
울다 웃는 나에게 이번에는 남자가 냅킨을 건넸다.”
박상영 단편 <믿음에 대하여> 중
지금은 왜 내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은 내가 혼잣말로 "내가 싫어, 내가 너무 싫어"라는 말을 했다. 이건 아마 이전부터 내 머릿속에 있던 말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나는 너무 놀랐고 그때부터 명상을 시작했다. 이 혼잣말을, 머릿속 생각을 멈추고 싶어서. 대신 "내가 좋아, 내가 정말 좋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어서. 나는 자기사랑 명상도 하고, 용서 명상도 하고, 자애 명상도 했다. 확언도 하고 암시도 하고 주문도 걸었다. 그런데 머릿속 이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내가 여전히 싫었다. 이걸 처음으로 타인에게 고백한 것도 작년인데, 작년 가을 나는 보이차를 마시러 갔다가 대표님에게 말했던 것이다. “내가 싫어라고 혼잣말을 해요. 그 혼잣말을 멈추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노력했는데…” 그때 같이 보이차를 마시고 있던 다른 4-50대 되는 (하지만 여전히 소녀 같으신) 여성 분이 말했다. “내가 싫으면 뭐 어때요? 나도 내가 싫어서 나를 때리곤 하는데. 봐봐요, 나는 내 몸을 이렇게 때리기도 해요." 그러고 자기 몸을 소리 내서 퍽퍽 쳤다. 나는 그게 웃겨서 울면서 웃었다. 그녀는 내 등을 토닥여줬고, 나와 같이 눈물을 흘렸다. 대표님은 묵묵히 보이차를 계속 따라줬다. 그렇게 섬세하고 다정했던 밤이 있었다.
‘자기사랑’
지난 6년 동안 나를 관통한 주제.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완벽주의에 빠져 나를 괴롭히고, 작은 실수에도 수치심을 느낀다.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자신감을 잃고, 수시로 나를 비판한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게도, 나는 저번 주에 들어서야 마음이 편안해져서—이제 진짜 힘든 시기가 끝났구나 싶었는데, 그러고 나니까 내가 나를 싫어하는 게 상관 없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내가 싫다는 감정조차 받아들인 것이다.
감정. 그것이 나에게 힘든 시기을 통과하는 열쇠였다. 모든 감정을 다 받아들이는 것. 슬픔, 혐오, 자책, 괴로움, 고통, 질투, 비참함, 비탄, 절망, 비루함, 수치심, 외로움, 분노, 그 무엇이든. 그것을 단지 나의 감정이라는 이유로, 다른 누구의 감정도 아닌 나의 감정이기 때문에—이제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전에 나는 감정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부정적인 감정은 최대한 억누르거나 피하고, 좋은 감정만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모든 감정이 내게 소중하다.
어슐러 르 귄은 미국의 SF 및 판타지 작가이다. 한편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인류학자인 앨프리드 클로버다. (나는 문화인류학과 출신이라서 인류학자에 대한 공부를 했다.) 예전에 그의 단편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을 읽었고 그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구절이 있었다.
“You can’t change anything from the outside in.
외부에서부터 안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Standing apart, looking down, talking the overview, you see pattern.
당신은 떨어져서, 내려다보며, 전체를 조망하면서 패턴을 본다.
What’s wrong, what’s missing.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빠졌는지 알게 된다.
You want to fix it.
그리고 그것을 고치고 싶어 한다.
But you can’t patch it.
하지만 임시방편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You have to be in it, weaving it.
그 안에 들어가야 하고, 그것을 다시 짜야한다.
You have to be part of the weaving.
당신도 그 짜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내가 문화인류학과에서 배운 것은 관찰하는 사람은 어떤 문화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필드웍을 가서 낯선 문화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했는데, 그건 의미 있는 작업이었지만, 아무리 뛰어난 통찰이나 패턴을 발견하더라도 그 문화나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의 외부자가 된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직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내 삶의 두려움, 분노, 좌절을 포함한 모든 감정을 생생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변화하기 위해 나는 “짜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어떤 날은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고 불안한 감정에 압도되었다. 오래된 트라우마가 떠올라 마음이 아픈 밤도 있었다. 그러나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을 때, 느껴야 하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관찰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포기하고 삶의 일부가 됐을 때—자고 일어나면 반드시 괜찮아지곤 했다. 그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한 구절을 생각했다. ‘어젯밤도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쳐 건넜구나’
“너한테는 그런 힘이 있어. 생각해 봐.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쳐 건넜잖아.”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감정은 변덕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기 어려운 건 아니다. 최소한 생각보다는 믿음직스럽다. 감정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니까.
박상영 소설로 돌아가서. 만약 주인공이 눈물이 나서 상대를 좋아하는지 알았다면, 그 마음은 진짜일까? 아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믿었다고 해도, 헤어진다는 말에 눈물이 난다면. 앞으로 영영 볼 수 없다는 말에 눈물이 난다면. 그건 아마도 상대를 좋아하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길 바랐다는 의미다.
영원할 거라는 믿음은 그의 말처럼 불경하고 한심한 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부 포함되어 있고,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은 이 세상에 드물기 때문에 숭고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영원할 거라는 믿음으로 상대방을 막 대했거나 조종하려고 했기 때문에, 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생각했었다. 눈물이 나기 전에 내가 슬픈지 (또는 누군가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면, 영원을 믿는 대신에 상대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그러면 많은 게 달라질 거라고.
소설 속 절망에서 희망을 느껴지는 건 인물들의 삶에서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연약한 믿음이 깨지고, 온전히 절망하는 순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지탱하는 삶. 배신당한 믿음은 회복되지 않고, 관계는 위태로워지거나 파국을 맞이하고, 폭설은 한동안 그치지 않겠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많은 게 달라질 거라고.
나 역시 영원한 관계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만,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는 이전보다는 적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싫어"라는 혼잣말을 한다. 그러나 6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은 게 달라졌는데 그 증거로 내 감정을 신뢰하게 됐다. 아마도 그건 나를 남들과 구분하고 외롭게 만드는 원인이겠지만, 내가 가진 일종의 외상 자국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사랑한다.
“공격이나 모욕을 받으면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상황을 모면하는 방어적인 사람,
상이한 정권 체제하의 회사에서 고루 지지받는
무취한 사람,
퀴어 커뮤니티와는 일절 교집합을 만들지 않는
강박적인 사람,
좌우를 막론한 정치계로부터 입당 제안을 받는
개성 없이 바르기만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수치심을 내면화하는 수동 공격적인 사람,
거짓말과 태연한 척이 습관이 되어버린
외로운 사람.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에 부합하지 않아 탈락하는
‘요즘 애들’이 되지 않기 위한 안간힘.
현대 노동자의 성격은 이처럼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의 증상적 일부로서 각인된
일종의 외상 자국이다.”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수록 비평 중
이 글에 나온 사주팔자를 봐준 선생님은 아는언니(@sister_4_u) 지은샘입니다. 지은샘은 요가원 요가다락(@yoga_darak)을 운영하고 있어요. 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송파로 이주해서 아쉬워요.
보이차를 대접받은 곳은 압구정 차요가(@cha_yoga)입니다. 저는 프리미엄 보이차가 그렇게 비싼지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보이차는 너무 맛있고 눈물이 나는 신기한 효능이 있습니다!
6년이 참 길었는데, 또 끝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지은샘이 힘든 시기가 끝나면 이 모든 기억을 망각할테니 글을 많이 써두라고 했는데, 뒤늦게 부랴부랴 남깁니다. 작년의 제가 이 글을 봤다면 웃다가 울었을 것 같아요. 그런 저에게 장례식장에서의 남자처럼 말 없이 냅킨을 건네고 싶네요.
제 글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도 재밌으니까 꼭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