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정답을 뒤집어 보자
요즘 살인적인 무더위에 시든 배추 이파리처럼 흐늘거리고 있습니다.
어제 밤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시끄러운 매미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덥고 지루한 하루였다고 무심코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혼자 지루함에 하품을 해도, 마음이 꽉 차 외로움, 열등감, 분노가 없는 이 순간. 이 순간을 10대의 나는 얼마나 바랬는가를.
저는 10년 전의 내가 간절히 바랬던 하루를 어느새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며, 그렇기에 평생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생물이라는 사실이 절망 그 자체였던 적이 있습니다.
10년 전, 인생에서 가장 순진무구하게 세상을 탐구하고 즐겨야 할 10대 시절, 인간 관계는 제 가장 큰 두려움이자 콤플렉스였습니다.
친구들과 모여 즐거운 듯 깔깔 웃는 이면으로, 비웃음과 놀림에 대한 두려움이 늘 한 켠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도 누가 장난인 척 나를 깔볼까, 사람들 앞에서 웃음 지으며 나를 창피 주려고 할까 불안했습니다. 짖궂은 장난을 당한 날에는 여름 날 차가운 수건을 얼굴에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더위를 식히려고 준건가, 아님 나를 공격한건가? 혹시 후자가 아닐까 싶어 혈관이 조여들었습니다.
관계는 서로 독을 품은 채 모른 척 찔러보는 암투의 현장이었으며, 불안의 근원이었습니다.
누가 더 창피를 많이 줄까. 누가 더 강할까. 누가 더 똑똑할까. 누가 더 인기가 많을까.
누가 이길까.
누군가 나를 놀려서 얼굴이 화끈거려도, 티를 내선 안된다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습니다. 쿨하지 않고 약해보이니까요. 화를 내면 졌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양 이를 악물고 깔깔 웃으며 그 자리에서 넘겨야 합니다.
모두와 헤어져 집에 오는 길,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함부로 날 깔보며 놀릴 수 있는 건, 내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야. 내가 더 완벽해져서,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 찍소리도 못하게 해줄거야.’
비장하게 공부를 했던 이유기도 합니다. 교육열이 높은 학교에서, 학생 신분으로 권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가장 좋은 한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공부. 공부를 잘해야지 선생님들이 예뻐했으며, 나처럼 공부를 잘하고 싶어 다가오는 아이들이 생길 것이었고, 친구들과 말다툼이 붙어도 내가 더 똑똑하(다고 여겨지)니까 소위 “말빨이 서기” 좋았습니다.
어디 가서 “공부 잘했네” 소리를 듣기 좋을 만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힘든 입시 기간이 보상 받는 기분이었고, 내 스펙이 높아진 것에 흡족했지만 아직 이걸로는 부족했지요.
모두가 고만고만한 머리를 지닌 대학에서는 관계에서 우월한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한 공식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공부만 잘해서는 매력이 없습니다. 아주 많은 친구들과 재밌게 잘 놀며, 다양한 서클에 참석하고, 이성에게 인기도 많아야 정말 쿨한, 요즘 말로 “인싸”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인싸라고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제 스스로 하루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해방감이 합쳐져 내가 얼마나 많은 약속을 잡아서 얼마나 빽빽한 스케줄을 가지고 있는지를 훈장으로 여겼습니다. 바쁘다는 감각이 삶을 정답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으면서요.
술과 관련된 무용담이 여기저기서 떠벌려지고, 불타오르는 썸 이야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기상천외한 모험을 한 이야기, 자신이 얼마나 센스가 빠른 여우가 되었는지, 어떤 핫한 맛집을 갔는지. 즉, 내가 얼마나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각종 SNS와 만남을 통해 넘쳐나는 시기였습니다.
바쁘다는 감각과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고 있다는 감각은 늘 그랬듯이 성취욕을 짜릿하게 자극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감각은 사실 무엇보다, 불시로 나를 덮치는 뼈가 시린 외로움과, 끊임없는 불안으로 저를 내몰았던 열등감이라는 어두운 감정을 마비시키기 위해 필요했다는 것을요. 남들에겐 늘 밝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했지만, 10대부터 지금껏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저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의무에 시달리며 관계를 불안해하고 있던 상태라는 것을, 저는 못 본 척 하고 있었습니다. 타인을 관중이나 라이벌로 보는 사람은 진정으로 타인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괴로운 밤에는 난 누군가와 진정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저주 받은 인간이라는 생각도 자주 들었습니다. 관계를 거듭하면 할수록, 타인과의 비교와 생각 없이 주고 받는 모욕이 쌓여 갔고, 그 결과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과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늘 무언가에 화가 난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고통의 원천인 관계를 끊어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습니다. 그 사실이 절망적이었습니다. 이 절망을 조금이라도 더 잊기 위해 바쁨과 인정이라는 마취제는 필수였습니다.
바쁨과 인정이라는 인간관계의 성공을 뜻하는 마취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그 수만큼 다양한 관계가 있다고 했던가요. 아름다운 말이지만, 제게는 정 반대의 메시지가 훨씬 더 자주 들려왔습니다. 때로 그 메시지는 인터넷 상의 댓글로, 친구가 슬쩍 던진 말로, 나보다 현명하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른의 충고로, 각종 광고로, 남의 험담으로 제게 들려왔습니다. 그 메시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계에는 정답이 있다고.
우선 관계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내가 관계를 시작하고 싶을 만한 매력적인 사람이어야 하겠지요. 활발하고 명랑해야 하며, 외향적이어야 하고, 너무 고집이 세지도 않아야 하며, 집단의 분위기는 절대 해치지 않아야 하고, 단체 행동을 좋아하고 즐기며, 튀는 행동도 금물이며, 트렌드에 뒤쳐지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여기에다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굴지 말고 쿨해야 하며, 착하다는 소리도 들어야 점수가 높은, 요즘 말하는 “인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궁극적인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관계의 스타일 또한 많은 사람들과 만나 즐겁게 웃고 떠드는 시간을 가지는 게 이상적이었지요.
그래야 남들이 부러워하는 멋진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무시 받고 놀림 받는 일을 피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내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정답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정답 관계가 모두가 원하고 인정하는 “인싸”와 그렇지 않은 “아싸” 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가장 멋진 “인싸”가 되는 길을 달려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모두가 외칩니다.
그렇기에 저는 늘 열등감과 외로움에 잔뜩 그을렸습니다. “인싸”에 집착하면 할수록, 늘 이상적인 “인싸”의 모습과의 괴리가 있는 현재의 부족한 제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애써 그렇지 않을거라 현실을 부정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인싸로 사는 게 즐거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내향적이기에, 에너지가 충전되고 하루의 동력을 얻는 시간은 혼자서 고요히 사색하거나 취미를 즐길 때였습니다.
감정적 동요가 이는 것도 그닥 즐기지 않는 편이기에, 차분하고 과묵했으며, 이것 저것 생각을 거듭한 뒤 의견을 뾰족하게 다듬은 후,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단체의 분위기를 즐겁게 할 만한 의견만 내놓아야 할 때는 가슴에 안개가 낀 듯 답답했습니다.
단체 행동도 그닥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여럿이서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놀면서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한두명의 소수의 친구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밤늦도록 의견을 나눌 때 훨씬 즐거웠습니다. 유행이나 트렌드에도 관심이 없었죠.
둔한 신경 덕분에 쿨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알았습니다. 깔보는 듯한 농담을 들은 날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았고, 늘 그랬듯 싸늘한 얼굴로 두고보자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힘주어 걸어갔지요.
착한 것과도 거리가 멀었죠. 타인을 늘 배려하고 온화하게 감싸주어 온갖 사랑을 받는 인기 있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신기하고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뭘 먹고 자라면 저렇게 태생적으로 착할 수 있는가. 왜 나는 약속에 늦는 친구 때문에 속으로는 화가 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이렇게 많으며, 나를 먼저 생각하는 걸까. 왜 이렇게 찌질할까.
그리고 왜 이런 나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까.
그런데 바로 여기에 답이 있었습니다. 저는 원인과 결과를 그간 단단히 착각해 왔습니다. 내가 부족해서 인사이더의 인간관계라는 정답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기에, 그 결과 나는 있는 그대로 수용될 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습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 아웃사이더 기질이 농후한 나를 수용하지 못하니 타인이 정한 정답 관계를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정답을 기준으로 하면 나는 오답이었지만, 나를 기준으로 하니 정답은 선택지 중 하나가 되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적응이야말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그 무언가에 적응하려고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가 싫어하는 그 무언가의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갑을 관계에서도 그렇지요. 을은 갑에 의해 부조리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관계에 적응하기 위해 갑의 행동을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노력합니다. 갑은 그럴 시도를 할 필요가 없는데도요. 공부와 시험이라면 지긋지긋한 학생이라도, 어쨌튼 적응하기 위해 꾸역꾸역 공부를 하게 되고, 점수가 아무리 낮아도 시험 제도를 거부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 정답이 정해져 있으며, 우리 모두는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사이더식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생적으로, 성격적으로 그 관계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아웃사이더의 입장에 서라는 건 무섭고 불편하며 상상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적응하고자 하는 의지는 이번에도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갑작스럽게 나는 자신을 수용한다고 외쳐도 눈에 띄는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진행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절대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 점차 내가 되어갑니다. 최소한 이번에는 내가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는 나로요.
흥미롭게도 제가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수용해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이것저것 재고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좋겠지만 그건 사실 도를 아주 많이 닦아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저와 비슷한 특이한 굴곡을 지닌 사람들에게 먼저 관점을 달리 해서 다가가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제게도 있는 그 모난 굴곡이 대중적으로 좋지 않다며 즉각적으로 거칠게 매도하고 배척했지만, 판단을 미루고 조용히 보다 보니, 그 굴곡만이 가진 매력과 그 굴곡이 형성된 복잡한 사정이 보였습니다. 그 특이한 굴곡을 고치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있는 그대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가진 굴곡도 괜찮아 보였습니다. 나도 그런 게 있다고 털어놓게 되었죠. 그러자 점차 주위가 나의 이상한 면면을 수용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위가 다르게 채워지니 나만의 관점에 자신감이 붙었고, 점점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선택적 인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주위 환경을 인지할 때, 자신에게 영향을 주거나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만을 인식하는 경향을 뜻하는데, 이번만큼 그 뜻을 실감하고 감사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교, 열등감, 인정을 투쟁하는 데 신경이 쏠려 있었던 때는 세상도 온통 그런 메시지로 차 있었는데, 점점 전혀 다른 메시지들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인사이더를 고집했을 땐, 아웃사이더는 인사이더에서 탈락한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정 받는 자” 인 인싸가 아닌, “인정 받지 못하는 자” 가 아싸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웃사이더의 관점을 택하니, 훨씬 넓은 차원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인정을 받지 못한 자가 아니라, 인정을 “하는” 자이자,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 자가 됩니다.
관점과 나에 대한 정의가 변화하자, 내가 바라는 인간관계의 모습이 달라졌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나만의 아웃사이더식(式) 인간관계 스타일이 생깁니다.
화려한 인상을 남기는 방법보단 오래 관계를 유지하며 충실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법을,
사람의 약점을 빨리 캐치하기 보단, 약점이 강점과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차분히 보는 법을,
왁 하고 불안을 줘서 사람을 조종하려는 말을 거부하고, 나와 맞는 충고를 가려 듣는 법을,
적은 친구를 사귀면서 얻은 통찰력과 자신감으로 사회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법을,
정말 소중한 관계를 자칫 무시하지 않는 법을,
조금은 비뚤게 보는 내 성격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법을,
멋진 타인을 보면, 나를 버리고 그가 되기 위해 그를 무조건 따라하려는 충동을 억제하는 법을,
한 주제에 대해 격렬하게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도,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존중하는 법을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전략의 기본은 내가 가진 것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간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싶지 않았고, 목표조차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늘 잘못된 전략을 세웠고, 버티다가 실패하고 쓰라려했습니다.
아웃사이더인 나를 그대로 파악하고, 여기에 맞는 목표와 방법을 설정하자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관계는 버티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간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는 부모님에게 맞는 길이, 타인에게는 타인에게 맞는 길이 있듯, 아웃사이더에는 아웃사이더에게 맞는 길이, 내게는 내게 맞는 길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는 사춘기 내내 치부로 여겨왔던 어두운 상처이자 치명적인 약점을 갑작스럽고 장황하게, 그것도 익명의 많은 사람에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요. 허허)
10년 전의 저라면 절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행동이지요.
이유는 단순히, 서두에 적었듯이 불현듯 10년 전의 제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강하고 밝은 척, 이를 악물고 으스대던 낮을 뒤로 하고, 끔찍한 열등감과 외로움에 밤에 펑펑 울기도 했던 어린 날의 저는 제발 구원이란 게 오기를 바랬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그 구원을 살며, 하품을 쩍쩍 하던 저이지만, 이 모습이 10년 전 제가 바랬던 간절히 바랬던 구원이란 걸 압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라도, 10년 전의 저처럼 인간관계로 많이 버겁고 숨이 찬 어딘가의 아웃사이더에게는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둠을 겪었기에, 빛을 더 적극적으로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정답대로가 아니라, 아웃사이더 식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