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X [ 누구도 멈출 수 없다]
[배움의 발견], 원제 Educated.
2020년은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미 올해의 책을 만난 것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들게 하는 책이다.
근본주의 모르몬교도 아버지 밑에서 공적 교육만이 아니라 의료 및 보건 제도의 혜택마저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 아니 그뿐만 아니라 온갖 정서적 물리적 학대를 학대인지도 모르고 견디며 자란 1986년생 타라 웨스트오버가 열일곱 살이 되어야 만난 "기적과 같은 배움의 여정"을 통해 스스로 새롭게 자아상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논픽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서사, 종종 닭살이 송송 올라올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는 디테일이 압도적인 읽기의 경험을 준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비망록을 읽고 배움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절감하지 않기란 어렵다. 망가지고 종속되어버린 자아를 해방시키는 유일한 힘이 배움에서 온다는 것을 500쪽이 넘는 이 책이 증명하고 있다. 이 책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열여섯 살의)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이 교육의 과정은 단지 빈 그릇에 지식을 채워넣는 식으로 깔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대개에게, 아직 제법 어린 나이의 아이일지라도, 그릇은 무언가로 이미 채워져 있기 마련이다. 그 순간까지 생물적 존재로서, 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게끔 해준 본능과 정보와 정서적 반응체계 같은 것들로.
그래서 배움은 있던 것을 덜어내고 새로운 것을 채워넣는 식으로 일어난다. 비우는 과정과 채우는 과정은 단속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배움learning은 un-learning과 필연적으로 한몸이다. 비우는 순간의 진공 상태는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비웠다가도 다시 붙들기 일쑤이며, 조마조마함을 무릅쓰고 한칸씩 비워내는 연습을 하면서 용기를 길러야 한다. 그러니 아마도, 익숙하던 삶의 기술을 손에서 놓고도 여전히 자존할 수 있음을 몸으로 익히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기술이요,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줄 수 있는 최선의 앎이 아닐까.
타라 웨스트오버에게 un-learning의 과정은 유난히 혹독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그릇에 채워져 있던 것은 스스로는 전체를 이룰 수 없는, 종속적이고 파편적인 자아상이요, 공포와 강압으로 가득찬 도그마다. 이런 자아상과 도그마가 지난 경험을 이루는, 때로 아름다운 기억, 정서적 바탕이 되는 사랑의 감각과 뒤섞여 있을 때, 비워냄은 살점이 함께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자아상과 도그마조차, 이제까지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 자신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방편이었으니까. 고통과 공포를 견뎌내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조립해, 남겨야 하는 정서적 경험과 떼어내야 하는 인식적 정보를 분리해내는 저자의 분투 앞에서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이 대단하고 각별한 이야기를 읽어낸 후, 직전에 읽었던 멜린다 게이츠의 [누구도 멈출 수 없다]를 겹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도 멈출 수 없다]는 세계 최대의 비영리재단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의 공동의장인 멜린다 게이츠의 책으로, 재단의 사업을 통해 그녀가 이뤄온 것, 이루려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발견하고 깨달은 것을 담고 있다.)
[배움의 발견]이 지닌 힘은 이야기 자체에서 오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가 1986년생의 삶이라는 점에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21세기에 접어드는 그 시점에 이런 식으로 길러진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사하라이남 아프리카로 가져간다면 어떨까? 아래는 [누구도 멈출 수 없다]의 일부다.
"사하라 이남에 위치한 다수의 농촌 지역에서는 여자아이라면 자기네 문화 관습에 복종해야 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하고, 당연히 문화 관습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사이 부족 공동체의 일원인 카케냐 은타이야는 다른 열세 살 여자아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나는 순간 이미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다. 카케냐는 사춘기가 될 때까지 초등학교에 다닐 것이다. 그리고 성기 절단 시술을 받을 것이고, 학교를 그만두게 될 것이며, 다섯 살에 이미 약혼해 둔 남자에게 시집을 갈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물을 긷고, 땔감을 모으고, 집 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밭일을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계획되어 있었고,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계획이었다."
이 이야기가 특별해지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카케냐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부터다. 그러나 카케냐의 그릇 역시 타라의 것과 마찬가지로 도그마로 채워져 있었다. 카케냐는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과 마을의 요구를 거부해도 좋다는 것을 몰랐다. 카케냐의 최선은 "성기 절단 시술을 받는 대신 결혼을 하지 않고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거래하는 것이었다. 그 거래 덕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카케냐는 끝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교육학 박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을 여자 아이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배움의 발견]을 덮고 [누구도 멈출 수 없다]를 떠올리며, 타라의 성장기에 경악했던 데 잠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카케냐의 성장기를 읽을 때, 나는 끔찍하다고 느꼈지만 경악하지는 않았다. 사하라 이남에 그런 아이들이 여전히 수없이 많다는 것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타라는 미국에서 성장한 1986년생의 백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배움의 발견]을 카케냐의 이야기와 이런 식으로 등치하기는 어렵다. [배움의 발견]은 1인칭의 서사인데다가, 500쪽이 넘는 비망록 아닌가. 직접적이며, 그러기에 세밀한 서사는 서너 쪽의 요약본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카케냐가 500쪽을 들여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면, 그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강력할 테고, 종속적이고 파편적이던 자아가 어떻게 자존하는 자아, 배우는 자아, 변화를 일으키는 자아로 변화했는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타라의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겠지만 동시에 같은 것이기도 할 테다.
그리고 우리는, 카케냐나 타라와 다를 바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여전히 세상에 많다는 것을 '안다.'
[배움의 발견]을 읽고, 이런 식으로 요약하고 비교하고 종합하는 게 조심스럽긴 하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때문인데 --- (책 말미에 붙어 있는 저자의 말로, 몇 가지 주요한 사건의 서술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다)
"두 사건 모두 각자 기억이 다른 부분이 많았고 그 내용도 다양했다. (...) 어떤 버전을 믿는다 해도 자세한 사항들은 중요하지 않고 <큰 그림>은 마찬가지라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디테일이 중요하다. 아버지가 루크 오빠를 혼자 산 아래로 내려 보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일이다.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은 숀 오빠를 뙤약볕에 그대로 뒀는지 아닌지도 중요한 일이다. 그 자세한 사항에 따라 다른 아버지, 다른 사람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 우리는 모두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보다 더 복잡한 존재들이다. 나는 이 비망록을 쓰면서 다른 어떤 때보다 그 진실을 절감했다."
타라 웨스트오버가 풀어낸 이야기는 (누구든 자신의 삶에 대해 쓴다면 그러할 듯이) 그 자체로 고유하고 특별해서, 해석하고 논평하는 순간, 화자를 조금쯤은 무례하게 단순화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타라의 말대로, "디테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보다 더 복잡한 존재들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구절이다. 책에 어울리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