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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주 May 19. 2020

더 많은 앎이 미래를 구원한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 덧붙인 추천사

라즈 파텔의 전작 <경제학의 배신(The Value of Nothing)>을 번역했던 인연으로 그가 내놓은 신작(공저)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의 추천사를 썼습니다. 책에 수록된 추천사이지만 전문을 아래 공개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어 보시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사람의 파트너십이 공고하기 위한 조건으로 어느 한쪽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논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관계는 상호적인 것이고어떤 이에게 좋은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나쁜 사람일  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가지는 이야기한다이왕이면 이미 본가에서 독립해서 살고 있는 사람을 선택하라고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 본가에 살고 있다면결혼하기 전에 먼저 독립해 사는 시간을 갖는 것을 생각해보라고도 조언한다집에서 나와 어머니의 가사노동이 드리웠던 보호막이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보호막이 보이기 시작한  자신의 기억 때문이다


깨끗한 방이 먼지가 굴러다니는 방으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물때 없는 세면대와 수도꼭지는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세탁기는 빨래라는 프로세스에서 지극히 일부만을 대신해줄 뿐이며요리는 장을 보는 데서부터 설거지를 마치고 그릇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익혀야 했다퇴근  저녁 자리를 갖거나 자기계발, 문화생활에 두어 시간을 쓰고 집에 돌아오면아침에 내가 어떤 집을 뒤로 하고 문을 나섰는지를   시가 넘어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 1인분의 일상을 매끈하게 유지하는  어떤 노동이 얼마나 필요한지 성년이 훌쩍 넘은 나이에야 알게  셈이다워킹맘이라는 표현도 “어머니는  하시나?” 같은 질문도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깨달았다값이 매겨지지 않은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 노동이 된다는 사실도.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나는 이제  가구의 일상을 배우자와 꾸려가며직업인으로서는 임팩트 투자자로 일하고 있다임팩트 투자는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흔들던 2008 정식화된 개념으로 ‘재무적 수익만이 아니라 사회적환경적 임팩트를 함께 고려하는 투자 가리킨다많은 사람이 임팩트 투자를 ‘착한 투자 묘사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앎의 투자라고 표현하곤 한다가사노동의 주책임자가 되고 나서야 가사노동의 값을   있게 되었듯이임팩트 투자자가 되고 나서야 우리 일상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비용이 제대로 치러지지 않은  어딘가로 전가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식물성 대체고기 사업에 투자하면서 소고기  근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발생한 온실가스와 폐수의 숨은 비용을 알게 되었다온디맨드로 청소 매니저를 매칭해주는 사업에 투자하면서 화장실을 포함한 공간 스무 평을 먼지 없이물때 없이 단정하게 청소하는 일에 치러지지 않았던 비용이 얼마인지 알게 되었다어린 아동이 문해와 기초수학을 스스로 익힐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 사업에 투자하면서 교육 접근성이 가로막히면 소득을 창출할 기회가 얼마나 줄어드는지 알게 되었다그리하여 어떤 이유에서건 기초 교육에 접근하지 못하는 아동들이 얼마큼의 기회비용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모든 비용은 오늘날 시장경제로나 회계기준으로나 셈해지지 않는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값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누군가 보상도 받지 못한  묵묵히  값을 치르고 있거나다가올 세대의 누군가가  값을 치르게  것이다. 지금의 자본 시장이 이런 비용을 셈하지 않게  것이 사람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  곳을 나란히 세워놓고  기업이 어떤 물건을 어떤 소비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팔고 있는지숨은 비용을 얼마나 사회로 전가하고 있는지 혹은 사회를 위해 숨은 가치를 얼마나 창출하고 있는지 낱낱이 보여줄  있다고 상상해보자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자기 돈 천만 원을 직접 투자하도록 한다면이때 사람들이 내릴 선택은  천만 원을 맡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의 선택과 제법 다를 것이다단순히 전문적 지식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투자의 영역에서 돈을 불리기 위한 선택으로부터 사회적 비용에 대한 고려가 제거된 것은 자산 운용이 하나의 산업으로 고도화되면서부터다 산업 안에서 자산을 가진 사람과 실제로  자산을 투자처로 배치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펀드매니저에게는 주어진 운용기한 안에 수익률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의무가 주어진다. 자연인으로서 가치 판단은 뒤에 놓으라고 요구 받는다그러나 자기 돈을 스스로 투자하는 개인은 자신의 경제적 필요와 사회적 가치관을 모두 종합하여 최적화된 판단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둘의 차이는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많은 앎의 결과다더구나 지금의 시장에서 숨은 사회적 비용을 알려면, 투자를 실천하는 쪽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내가 역자로 이름을 올린 <경제학의 배신The Value of Nothing> 저자 라즈 파텔이 공저자로 펴낸 신작이다나는 제법  기간 종사했던 투자업을 떠난   1년이 되지 않은 때에  책을 만나 번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제학의 배신> 2008 금융위기의 여파가 남아 있던  출간된 책으로금융위기의 원인이 어긋난 자본시장의 셈법에 있다고 지적한다실은 많은 자산의 가격이 자산의 가치와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바로  괴리가 점점 벌어진 끝에 일어난 파국이 바로 금융위기라고 주장한다


<경제학의 배신> 읽으면서 세계관이 재배열되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기업에 투자하는 일을 하는 동안 나는 기업의 재무제표를 추정하는 거대한 스프레드시트를 만드는 작업을 좋아했었다. 5년치쯤의 재무제표를 추정하려면 기업이 벌이는 모든 활동에 어떤 값이 매겨지는지 계산하고 예상할  있어야 한다그때의 나는 내가 만드는 스프레드시트가 하나의 온전한 세계라고 여겼다전통적인 투자업의 문법을 잠시 떠나 <경제학의 배신> 번역하면서 나는 기업의 활동을 담아낸다 믿었던  스프레드시트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누락되어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비용을 실은 사회가 미래 세대가 떠안고 있음을 배웠다지금 임팩트 투자를 하게  여정의 출발점에 <경제학의 배신> 있었던 셈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경제학의 배신>에서  나아간다 값이 숨겨져 있어 저렴해 보이지만 실은 저렴하지 않은 것들-자연노동돌봄식량에너지생명- 저렴해지까지 지구가 그리고 인류 사회가 치러야 했던 값을 보여준다 값은 경제의 영역에서 철저히 숨겨져 존재하지 않는  취급되었지만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부채로 남았다 책은 값진 것들을 저렴하게 만듦으로써 가능했던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그런 자본주의가 인류의 눈부신 진보를 가져왔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그렇지만  진보의 과실이 미래 세대가 치러야  비용에 기대어왔다는 사실을  늦기 전에 상기해야 한다나는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더 나은 자본주의에 대한 상상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그동안 감춰진 비용에 대한  많은 앎으로부터  것이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쏟아내는 낯선 관점과 생경한 정보를 따라가며 “그래서 이제 무엇을?”이라는 질문이 나를 내내 불편하게 만들었다저자들은 끝까지  대답을 시원하게 내놓지 않는 대신 불편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 거듭하기를 촉구한다.


“유일한 잘못이 지금 태어난 것인 사람들, 여성, 원주민, 기후변화와 공해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면, 그리고 이 문장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 모두의 행위가 모여 그들의 삶을 더 악화시킨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


 책을 덮으며  마음에 깊이 남은 문장이다아마도 우리는 아직  답을 모르지만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오늘어딘가에서부터 시작할 수는 있다 책이 더해주는 앎이  여정을 시작하게 해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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