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현주의 #굿비즈니스_굿머니 #6
[경향신문 2019년 4월 25일 기고]
더윙(The Wing)이라는 기업이 있다. 뉴욕에서 출발한 여성만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와 코워킹스페이스를 운영한다. 자신들의 뿌리가 19세기에 시작해 1920년대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시기에 가장 활발히 펼쳐졌던 여성 클럽운동에 있다고 말하는 더윙의 코워킹스페이스에는 여성만이 멤버로 가입하고 입장할 수 있다. 연회비가 250만원이 넘는 더윙 코워킹스페이스 멤버십에는 대기자 명단이 늘어선다. 2016년 10월 뉴욕에 1호점을 연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위워크 등으로부터 350억원가량의 투자를 유치했고, 올 4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 7호점을 열었다. 더윙의 창업자는 두 명의 여성, 오드리 젤먼과 로렌 카산이다.
빌리에(Billie)는 여성을 위한 면도기 정기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빌리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면도기가 여성의 체모를 부드럽게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동영상이 돌아간다. 남성의 면도기 광고에서처럼 체모를 없는 듯 굳이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빌리에의 면도기에는 핑크택스(pink tax)가 없다. 핑크택스는 여성용 상품이 남성용 상품보다 별 이유 없이 비싼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빌리에의 공동 창업자 조지나 굴리는 여성용 면도기는 똑같은 조건의 남성용 면도기에 비해 7% 정도 비싸다면서, 빌리에의 면도기에서는 핑크택스로 인한 가격 거품을 걷어냈다고 말한다.
롤라(Lola)는 유기농 재료, 무해한 성분들로 만든 생리대와 탐폰을 판매한다. 여성이 만든 여성을 위한 제품을 표방하는 기업이다. 더윙과 마찬가지로 두 명의 여성, 조다나 키에르와 알렉산드라 프리드먼이 롤라의 창업자다.
이 기업들의 공통점은? 그렇다. 여성이 창업한 기업, 여성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그런데 그외에도 공통점이 또 있다. 세 곳 모두 전설적인 테니스 스타 세리나 윌리엄스가 투자한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세리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룬 선수이며, 총 8차례 세계랭킹 1위에 올랐고, 최대 186주 연속해 1위에 머무른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우승을 한 세리나이지만 그를 더욱 특별한 스포츠 영웅으로 만든 것은 2018년 7월 영국 윔블던 대회에서 거둔 준우승이다. 아이를 낳고 임신 합병증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뒤 복귀한 지 네 번째 대회 만에 준우승을 거둔 후 세리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위해 뛰었다. 내 테니스 여정은 이제 막 다시 시작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전통적으로 백인 중심의 스포츠인 테니스에서 흑인 여성으로 ‘여자 같지 않다’는 비아냥을 수없이 들어온 세리나가 엄마로서 돌아와 승리를 거두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지난 19일 세리나는 거기서 또 한 걸음을 크게 내디디며 투자자로서의 존재를 드러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세리나 벤처스(Serena Ventures)’라는 투자사를 통해 지난 5년간 30개가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해온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에게 세리나 벤처스를 통한 투자는 단순한 재산 굴리기라기보다는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의 표현이기도 하다. 더윙, 빌리에, 롤라 같은 기업들을 보면 여성이자 엄마인 스포츠 영웅 세리나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리나가 지향하는 가치를 엿볼 수 있는 투자처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임파서블푸드(Impossible Food)는 식물성 대체 고기를 만드는 기업이다. 콩과 감자 등에서 추출한 단백질로 고기의 질감과 맛을 구현해낸다. 6년 전 창업한 이래 이제껏 4000억원가량의 투자를 유치했을 만큼 성장성도, 잠재력도 인정받았다. 나 역시 홍콩에 여행을 갔을 때 임파서블푸드의 패티가 들어간 중국식 햄버거 ‘바오’를 먹어보고 깜짝 놀랐다. 불그스름한 핏기에 촉촉한 육즙, 고기기름이 구워져 내는 바삭바삭한 식감까지 진짜 고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이런 ‘대체’ 고기가 있다면 기꺼이 채식주의자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열렬한 육식주의자이긴 하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환경 비용이 지불되는지 잘 알고 있다. 소고기 1㎏을 생산하는 데 물은 1만5000ℓ가 소요되고, 공장식 축산은 엄청난 온실가스를 뿜어내며, 전염병의 확산 역시 고질적인 문제다. 프로펠(Propel)은 저소득층이 사회복지 서비스 및 금융 서비스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한다. 웨이브(Wave)는 금융 인프라가 열악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문자 메시지 보내기’만큼 간편한 송금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프리카계 이민자와 노동자들이 저렴하고 손쉽게 본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모두 지향하는 가치가 비즈니스에 녹아들어 있는 기업들이다.
세리나는 창업 초창기 기업에만 투자한다면서, 이를 통해 “세상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투자는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영향력을 나누는 일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 어떤 매체를 읽는지, 어떤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는지만이 아니라 어떤 곳에 투자하는지가 효과적인 사회적 의견 또는 지지의 표현일 수 있다. 동시에 그 표현이 돈을 불리는 일과 굳이 충돌하지도 않는다. 세리나 벤처스가 이제껏 투자한 기업들의 가치는 총 120억달러에 달하며, 60% 이상의 기업이 여성 또는 소수 인종 창업자에 의해 설립되었다.
김연아 벤처스나 장미란 벤처스를 언젠가 볼 수 있을까? 아이유 벤처스나 보아 벤처스도 좋겠다. 가치관을 공유하며 투자를 집행할 줄 아는 파트너가 필요하다면 연락해 주시기를. 사심을 담아 마지막 문장을 써본다.